성인 자료실

구분 성인명     축일 신분 지역명 검색
이시임 안나(5.29)

이시임 안나(5.29) 기본정보 [기본정보] [사진/그림] [자료실] 인쇄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성인명 이시임 안나 (李時壬 Anna)
축일 5월 29일
성인구분 복녀
신분 양반, 과부, 순교자
활동지역 한국(Korea)
활동연도 1782-1816년
같은이름 낸시, 니나, 애나, 애니, 앤, 이 안나, 이안나
성지와 사적지 게시판
제목 한국 교회사 속 여성: 여성의 동등한 지위를 싹틔운 이시임 안나 복녀
이전글 1830년대 로마가톨릭(천주교)의 동아시아 선교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의 활동
다음글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읽기: 영혼과 육체가 결합된 완전한 인간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0-01-19 조회수170 추천수0

[한국 교회사 속 여성 - 순조(교회 재건기)] ‘여성의 동등한 지위’를 싹틔운 이시임 안나 복녀

 

 

박해의 위력이 수그러들면서 신자들은 ‘얼빠진 상태’에서 깨어나, 차츰 신자의 본분을 지키려 했다. 서울에서 몇몇 지도자의 후손들이 교회 재건을 위해 온 힘을 기울이는 동안, 교우들은 산속으로 숨어들어 ‘튼실한 병사’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들은 한길에서라도 마주치면 멀찍이 눈인사가 고작이었는데, 이제 다시 만나고 서로 수를 헤아리며 모이기 시작했다. 죽었거나 귀양을 간 줄 알았던 이를 찾고, 각자 목격한 무서운 광경이나 교훈이 되는 행적도 증언했다. 그들은 결국 마음 놓고 기도할 수 있는 숨은 동네, 곧 ‘교우촌’을 세웠다. 이시임 안나(1782-1816년)는 교회 공동체를 찾아 헤맸고, 순교로 주님 사랑을 드러낸 복자이다.

 

 

동정 서원은 짓밟히고

 

대구대교구에는 여성 복자가 세 위인데 모두 을해박해 순교자이다. 그중 이시임은 함평 이씨로, 충청도 덕산 높은뫼(현 예산군 고덕면 몽곡리)에서 대대로 무관을 지낸 양반가에서 이희운의 3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오빠 성지(일명 儒定)와 동생 성삼(일명 儒震)도 순교자이다. 집안에서 남자 형제들이 1802년 무렵에 천주교를 믿기 시작했다고 하니, 박해로 천주교회가 와해되는 걸 경험하면서 입교한 집안이다. 또한, 막내 이성삼이 순교한 뒤 그의 아내와 딸이 광주로 유배 간 홍재영에게 가 그곳에 머무른 사실을 보면 교회 내에서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덕산은 강완숙의 시가 동네이며 초기 교회에서 크게 활동한 홍씨 일가들의 세거지지였다.

 

이시임은 나이가 들면서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동정을 지키고자 여성 신앙 공동체를 찾아 나섰다. 1815년 그가 체포되었을 때 그의 아들이 네 살밖에 되지 않았으니, 아마도 집안이 신앙을 지키려고 모두 고향을 떠났을 때일 듯싶다. 어쨌든 이시임은 여성 신앙 공동체로 가려고 교우 뱃사공 박 씨에게 길안내를 부탁했다. 그런데 길을 가던 도중 박 씨는 이시임의 동정을 빼앗았다. 이시임은 ‘선한 의지’를 짓밟혀 비통했지만, 펼쳐진 삶을 받아들였고 뱃사공 박 씨와 살았다.

 

 

조선 왕조에 세워진 근대 혼인 예식

 

30여 년 뒤 다블뤼 주교는 순교 행적을 조사하면서, 교회의 가르침에 반하는 이 상황을 이해시키려고 애썼다. 그는 이시임이 비열한 뱃사공과 살기로 한 것은 ‘남편이나 부모의 권한에 있지 않은 여자는 누구든지 먼저 차지하는 자의 소유’라는 타락한 조선 관습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시임이 소송을 제기한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을 것이며, 또 뱃사공의 손에서 벗어나려면 목숨을 걸어야 했겠지만, 그러나 거기에서 벗어난다 해도 도중에 또 다른 불한당의 손아귀에 들어갈 위험이 있었다.

 

이시임은 ‘아무 말썽 없이’ 정당한 결혼이 성립되는 이 생활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다블뤼 주교는, “더욱이 여인을 천대하고 멸시하는 것이 자연법처럼 되어 있는 나라에서는 여자들 자신도 이런 사상을 가지고 있다. 여자들은 권리도 책임도 없다고 생각하고, 이러한 경우에 정말로 사슬에 묶인 것처럼 생각하며 거기에서 해방되어 나갈 마음조차 품지 못한다.”고 한탄했다.

 

얼굴도 보지 못하고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과 집안끼리 정해준 대로 혼인하던 조선 사회에서 가톨릭의 혼인성사는 낯선 가르침이었다. 교회에서는 ‘혼배’란 부모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당사자들을 위해 하는 것임을 천명했다. 예식에서는 많은 교우 앞에서 신랑, 신부에게 각각 “여기 있는 아무개를 자모이신 성교회의 법대로 바른 ‘배우자’ 삼기를 원합니까?”라고 물어, 원한다는 답을 받고 증인을 세우며 문서로 남기도록 했다. 당사자의 원의를 꺾거나 강박하면 ‘핍박 조당’에 해당하며 당사자의 본뜻이 없는 혼인은 ‘무효’라고 가르쳤다. 그리하여 30년이나 지난 뒤, 이시임이 이 상황을 박차고 나오지 않았음에 놀라워했다.

 

 

아이, 위탁받은 생명은 귀천하고

 

이시임은 ‘종악’이라는 아이를 낳았고, 얼마지 않아 과부가 되었다. 홀로된 이시임은 아이를 데리고 진보 머루산(현 경북 영양군 석보면)교우촌을 찾아갔다. 그곳에는 고향 사람, 또는 자기 식구들이 있었던 것 같다. 이시임은 1815년 ‘부활 축일’에 많은 신자와 함께 체포되었다. 그는 안동 진영을 거쳐 대구에 있던 경상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1815년 10월 이시임에게 사형이 선고되고, 11월에 사형이 확정되었다. 그러나 형은 1년이나 지나서 집행되었다.

 

옥 안의 궁핍과 굶주림은 험악했다. 전국에 무서운 기근이 들었던 1815년 감옥 안의 식량 사정은 최악이었으나 신자 죄수들은 감옥 속의 어려움을 견디면서 천주교를 알렸다. 그들은 낮에는 생계를 위해 짚신을 삼고, 밤에는 함께 성경을 읽으며 공동 기도를 드렸다. 그들은 규율이 잘 잡힌 가족 같았다.

 

이를 본 외교인들도 감탄했고, 포졸들도 가끔 와서 천주교가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했다. 이시임의 아들 박종악은 이때 엄마 품에서 죽었다. 그러나 이시임은 어린 아들이 죄짓지 않고 일찍 가게 되었다며 오히려 위로 삼았다.

 

이시임은  대구의 관덕정 형장에서 참수되어 치명했다. 남자 다섯 명이 먼저 형을 치를 때, 이시임과 또다른 여성 동료 구성열은 그 과정을 고스란히 견디었다. 마지막 순간 관장은 여자의 몸으로 왜 굳이 죽음을 택하느냐며 다시 한번 배교를 유도했다. 그러자 그네들은 “남자들은 천상의 아버지이신 천주를 공경하고, 여자들은 그리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까?”라고 답했다.

 

 

순조 임금 때 켜진 ‘현대 여성의 지위’

 

한국에서 혼인하지 않는 여성, 권리와 책임에서 남녀의 동등한 몫을 인지하는 일이 일반화된 것이 그리 오래된 일이던가? 어쨌든, 이는 순조 임금 시절 신앙을 지키려 거처할 곳을 찾아 헤맸던 젊은 여성이 켜 놓은 등불의 반사이다. 그러면서도 관습은 켜켜이 늘어진 투명 그물망 같아서 벗어나는 데 개인의 깨달음보다 훨씬 더 시간이 걸렸음도 간과할 수 없다.

 

이시임은 강제 혼인에 대해 저항하라는 교회의 가르침을 혼자서는 지켜낼 수 없었다. 그러나 이후의 교우들은 점점 이러한 관습도 타개해 나갔다. 나중에는 외교인에게 강탈되거나 업혀 갔던 신자 과부들이 죽음까지도 무릅쓰고 항거하여 도망쳐 나오는 일이 빈번해졌다. 이 같은 깨달음과 용기 있는 실천은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여성의 지위를 향해 조선 왕조 후기부터 단계적으로 엮어져 내려왔다. 거기에는 이시임 같은 여성이 있었다.

 

* 김정숙 아기 예수의 데레사 - 영남대학교 역사학과 명예 교수. 대구관덕정순교기념관 운영 위원, 대구가톨릭학술원 회원, 대구대교구와 수원교구 시복시성추진위원회 위원이며, 안동교회사연구소 객원 연구원이다.

 

[경향잡지, 2020년 1월호, 김정숙 아기 예수의 데레사]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Total 0 ]
등록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