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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6세(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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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성인명 바오로 6세 (Paul VI)
축일 5월 29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교황
활동지역
활동연도 1897-1978년
같은이름 몬티니, 바울로, 바울루스, 빠울로, 빠울루스, 파울로, 파울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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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 바오로 6세 교황 독서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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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9-11-26 조회수24 추천수0

5월 29일 성 바오로 6세 교황


독서 기도

 

조반니 바티스타 몬티니는 1897년 9월 26일 이탈리아 브레시아 근처 콘체시오 마을에서 태어났다. 1920년 5월 29일 사제직에 오르고 사도좌에 봉사한 뒤 밀라노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1963년 6월 21일 베드로 교좌에 올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성공적으로 마쳤으며, 교회 생활의 쇄신, 특히 전례 개혁, 교회 일치 대화와 현대 세계의 복음 선포를 증진하였다. 1978년 8월 6일 하느님께 마지막 숨을 바쳤다.

 

(Ⅱ권)목자 공통: 교황, 1857.

(Ⅲ권)목자 공통: 교황, 1749.

 

제2독서

성 바오로 6세 교황의 강론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마지막 공개 회기, 1965.12.7., AAS 58[1966], 53.55-56.58-59)

 

하느님을 알려면 인간을 알아야 합니다

 

 

이 공의회에 힘입어, 인간 본성과 세계에 관한 이른바 하느님 중심의 신학적 가르침을 우리 시대의 사고에 뒤떨어진 부적절한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의 마음이 제자리로 돌아섰습니다. 그리하여 세상이 처음에는 참으로 어리석은 것이라고 판단하였던 이러한 교리를 자기 것으로 삼아, 이제는 우리가 확신하는 대로, 인간적이고 지혜로우며 구원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고 여기며, 하느님께서 계심을 스스로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분명히 존재하시고, 참으로 실존하시며, 살아 계십니다. 하느님은 위격이십니다. 섭리하시는 하느님께서는 무한한 선을 지니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자체로 선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지극히 선하신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창조주이시고 우리의 진리이시며 우리의 행복이십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기 마음과 생각을 하느님께 집중하며 관상이라는 정신 활동을 하는 것을 모든 활동 가운데에서 가장 고귀하고 가장 완전한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우리 시대에도 이러한 관상을 통하여 수많은 분야의 인간 활동은 각기 그 품위를 지닐 수 있고 또 지녀야 합니다.

 

공의회에 모인 교회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또 하느님과 결합된 자신뿐만 아니라 인간과 이루는 관계에 대하여 참으로 깊이 숙고하고자 하였습니다. 실제로 이 시대에 자신을 바라보는 인간,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인간, 오로지 자신 안에만 갇혀 있는 인간, 자신만이 유일한 중심인 듯 모든 관심과 존중을 받아야 한다고 여길 뿐만 아니라, 자신이 모든 일의 원리이며 이유라고 서슴없이 주장하는 인간에 대하여 우리는 깊이 숙고하였습니다. 현대의 용어를 빌리자면, 현상학적 전인이 그 마음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을 공의회 교부들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 교부들 자신이 인간입니다. 그들은 모두 목자이며 형제이고, 깊은 염려와 애정을 지닌 인간입니다. 비참한 운명을 거침없이 한탄하는 인간입니다. 과거에도 이 시대에도 다른 사람들을 자기 아래로 내려다보는 인간, 언제나 나약하고 가식적이며 이기적이고 야만적인 인간입니다. 웃음을 짓고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못마땅해하기도 하는 인간, 어떠한 역할이든 쉽게 해내며 모든 일에 다재다능한 인간, 오직 과학의 탐구에만 열중하는 인간입니다. 이러한 사람으로서 생각하고 사랑하며 노동으로 땀 흘리고 언제나 다른 일에 마음을 쓰는 인간입니다. 어떤 종교를 믿기에, 순진무구한 유년기를 보냈기에, 가난의 신비 때문에, 고통으로 생겨난 신심 때문에 신성하다고 여겨야 할 인간입니다. 여기서는 자기 혼자만 있고 싶어 하고 저기서는 사회를 좋아하는 인간입니다. ‘현재의 시간을 찬미’하는 동시에 미래의 시간을 기다리며 과거보다 더 행복한 시간을 바라는 인간입니다. 한편으로는 범죄를 저지르면서도 다른 편에서는 성덕으로 꾸며지는 인간입니다. 그리고 이러저러한 모습들이 계속 보입니다. 인간성의 세속적인 열정, 그 엄청난 열정은 이제는 모두 경쟁하듯이 나서서, 이를테면 공의회에 도전을 제기하였습니다. 사람이 되시고자 하신 하느님을 예배하는 종교가, 미루어 생각하자면, 하느님이 되고자 하는 인간을 예배하는 종교와 서로 만났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갈등과 전쟁, 파문이나 단죄가 일어났습니까? 물론 그리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전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우리 공의회의 영성적 특성을 지배하는 규범과 전형은 착한 사마리아인에 관한 저 옛 이야기였습니다. 실제로 인간에 대한 어떤 무한한 사랑이 공의회에 속속들이 스며들었습니다. 인간을 더욱더 괴롭히고 있는 그들의 모든 곤경을 바라보고 거듭 헤아리며, 이 땅의 자녀가 더 많이 자라도록 하는 데에 이 공의회의 모든 열정을 다 쏟았습니다. 이 시대에 인간성을 예배하는 여러분, 적어도 이 정도의 찬사는 공의회에 보내 주십시오. 사물의 본성을 초월하는 진리를 거부하는 여러분, 똑같은 인간성에 대한 우리의 새로운 열정은 인정해 주십시오. 또한 우리도, 바로 우리가 그 누구보다도 앞서 인간을 섬기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가톨릭 신앙과 인간 생활은 서로 우호 관계를 맺고 있고, 둘 다 똑같이 하나인 인간 선을 추구한다고, 곧 가톨릭 신앙은 인류를 위하여 존재하며 어느 모로든 인류의 삶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인간에 대하여 전하는 바로 이 뛰어난 가르침 때문에, 우리는 그 삶을 모든 면에서 완전한 삶이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인간은 그 자체로 신비로운 존재가 아닙니까?) 그 가르침은 분명히 하느님에 대한 지식에서 길어 올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을, 곧 참되고 온전한 인간을 완전히 알려면 반드시 먼저 하느님을 알아야 합니다.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이 각자의 얼굴에서, 특히 눈물과 고통의 흔적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얼굴에서 사람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얼굴을 알아보아야 한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그리고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하신 말씀에 따라,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하늘에 계신 하느님 아버지의 얼굴을 알아본다면, 인간사를 헤아리는 우리의 사고방식은 모든 것이 하느님 중심으로 수렴되는 그리스도 신앙으로 바뀌게 됩니다. 우리는 이렇게도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알려면 인간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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