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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8.14)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8.14) 기본정보 [기본정보] [사진/그림] [자료실] 인쇄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성인명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Maximilian Mary Kolbe)
축일 8월 14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신부, 순교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1894-1941년
같은이름 꼴베, 막시밀리아누스, 막시밀리안, 막씨밀리아노, 막씨밀리아누스, 맥시밀리안, 맥시밀리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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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와 함께 하는 성인: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 사랑의 순교번호 166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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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11-28 조회수825 추천수1

[나와 함께 하는 성인]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1891-1941년)


사랑의 순교번호 ‘16670’

 

 

‘성모님의 영광을 위하여 모든 것을, 나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죽음의 수용소라 불렸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죄수번호 ‘16670’으로 불렸던 콜베 신부, ‘성모님이 함께 계시니 저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항상 의연했고 침착했으며 평화로웠다. 그리고 그는 ‘내가 저 사람을 대신해서 죽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Maximilianus Maria Kolbe, 이하 콜베 신부라 칭함)는 1894년, 폴란드 즈던스카 볼라(Zdunska Wola)에서 공무원인 아버지 율리오 콜베와 어머니 마리아 다브로프스카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라이문트’라 불렸던 그는 성모님이 나타나는 꿈을 꾸게 되는데, 꿈에 ‘힌빛 왕관’과 ‘붉은빛 왕관’을 든 성모님이 어느 것을 가지고 싶으냐고 물으니, 어린 라이문트는 두 개 모두 가지고 싶다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이는 훗날 그의 성직자로서의 삶에서 신앙의 축을 암시하는 듯하다. 그는 성직자로서, 지고지순한 마음을 품고 오직 주님만을 따르는 정결함의 상징인 흰색 왕관처럼 살았고, 마지막은 다른 이를 대신하는 죽음으로 순교를 의미하는 붉은색 왕관처럼 살았기 때문이다.

 

 

온유와 평화로 세상을 대하다

 

그는 14세에 르부프 소신학교에 입학,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한다. 그리고 1912년에는 로마로 유학, 1917년에는 동료수사 6명과 함께 ‘성모 기사회’를 창설하고, 이듬해인 1918년, 사제로 서품된다. 1929년부터 약 7년 동안은 일본을 비롯한 동양의 선교 활동에 이바지했으며, 1936년에는 폴란드 성모의 마을에서 수사 양성과 교육에 이바지한다.

 

그는 항상 겸손과 이해로 수사들을 대했다. 자녀를 대하는 부모의 마음으로 그는 수사들을 ‘아들들’이라 불렀으며, 아들들(수사)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것들을 아낌없이 가르쳤다. 그런 그의 행동은 젊은 수사들에게 살아있는 수도생활의 교본이 되었다.

 

1941년, 제2차 세계대전으로 폴란드가 침공당하자, 그는 동료 수사들과 함께 체포된다. ‘성모 기사회’ 잡지 발행을 하는 유력언론인으로, 그리고 유다인을 도왔다는 이유였다.

 

굶주림과 추위, 매질이 반복되는 수감생활에서 그는 자신을 보호하기보다 두려움과 공포에 떠는 다른 수사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의연한 태도를 보인다. 그는 항상 기도하였고, 고통받는 수감자들을 위로하였다. 1941년 5월 28일, ‘죽음의 수용소’라 불리는 아우슈비츠로 이송된 그는, 전보다 더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수감자들을 위로하고 돌보는데 더욱 힘을 쏟는다. 건강한 사람도 견디기 힘든 수용소에서의 삶은, 평소 폐병을 앓고 있던 그에게는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의 나날이었다. 한번은 쓰러져 힘겨워하는 그에게 사람들이 도움을 손길을 내밀자 ‘성모님이 함께 하시니 저는 괜찮습니다’ 하면서 침착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고 한다. 수용소에서의 그의 모습은 너무나도 특별하여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으며, 그들은 콜베 신부에 대해서 ‘그는 항상 온유하였고 평화로웠습니다’라고 말했다.

 

 

“내가 저 사람을 대신해서 죽겠습니다”

 

어느 날, 그가 속한 막사에서 탈출자가 발생하자, 간수는 10명의 죄수를 무작위로 뽑아 아사형에 처하려 했다. 콜베 신부는 지목되지 않았지만, 지목된 사람 중에, 아내와 자식이 있으니 제발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한 사람을 보게 된다. 이에 콜베 신부는 간수 앞에 나선다. “내가 저 사람을 대신해서 죽겠소.” 유례없는 이변에 놀란 간수가 ‘너는 누가냐?’ 하고 묻자 콜베 신부는 대답했다.

 

‘저는 가톨릭 사제입니다.’

 

콜베 신부는 죄수들과 함께 아사감방으로 옮겨졌고, 그곳에서도 사형수들의 마음을 위로했다. 아사감방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그는, 결국 독극물 주사를 맞고 선종한다. 그때가 성모승천대축일 전날인 1941년 8월 14일, 그의 나이 47세였다.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 배려와 용서, 사랑을 실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콜베 신부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 모든 것이 가능한 사람이었고 준비된 사람이었다. ‘성모님께서 함께 하시면 하지 못할 일이 없다’는 신념으로 살아온 콜베 신부. 그래서 그에게 죽음조차 두렵지 않았다.

 

콜베 신부의 삶은 에밀리 디킨슨의 ‘If I can’이라는 시를 떠올리게 한다. ‘내가 만약… 다른 이의 상처를(고통을) 막을 수 있다면 나 헛되이 산 것이 아니리니…’ 그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성모님과 함께하는 삶에는 그 어떤 두려움도 없다는 것을 안다. 이를 증명하는 노력들이 필요할 때이다.

 

[외침, 2018년 11월호(수원교구 복음화국 발행), 김나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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