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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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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성인명 바오로 (Paul)
축일 6월 29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사도, 순교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64/67년경
같은이름 바울로, 빠울로, 빠울루스, 파울로, 파울루스,
성지와 사적지 게시판
제목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극과 극, 두 사도 통해 교회의 본질 드러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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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0-06-30 조회수120 추천수0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극과 극’ 두 사도 통해 교회의 본질 드러내다

 

 

교회는 매년 6월 29일을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로 기념하고 있다. 교회 역사에서 가장 큰 발자욱을 남긴 두 사도를 교회는 같은 날 기념한다. 또한 교회는 이 축일과 가장 가까운 주일을 교황 주일로 지내기도 한다. 두 사도는 서로 매우 대조적인 특징을 보이지만 똑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오롯한 삶을 드러낸다.

 

사도 베드로. 카를로 크리벨리 작품.

 

 

가장 대조적인 두 사도를 기리는 축일

 

그리스도교 역사의 가장 큰 두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두 인물을 교회는 왜 같은 날 기념하고 있는가? 우선 베드로는 첫 번째 교황이며 예수님의 12제자들의 지도자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에게 ‘바위’, ‘반석’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고 그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울 것이라며 그 이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이방인들의 사도’인 바오로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환시 중에 그리스도를 만난 그는 이전의 삶을 완전히 버리고, 교회가 유다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고 깨달아 결국 온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는 선구자가 됐다.

 

유다인으로서 여전히 율법과 전통에서 아직 벗어나지 않았던 베드로, 그리고 단지 율법에 얽매여 온 세상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그르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바오로가 대립과 긴장을 자아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 두 역사적인 인물은 결국 그러한 긴장 속에서도 화해와 일치를 해치지 않고 그리스도를 온 세상의 주님으로 선포하는 데 기여했다. 교회가 이 두 상반된 인물을 같은 축일에 기념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리스도교 생활과 교리가 담고 있는 이 두 상반된 방향이 하나의 진리로 수렴됨을 교회는 이 축일을 통해 가르친다.

 

사도 바오로. 카를로 크리벨리 작품.

 

 

열쇠를 든 베드로와 칼을 든 바오로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는 여러 가지 면에서 상반된 특징들을 갖고 있다.

 

전통적으로 교회의 성미술은 두 사도를 각각 특징적으로 그린다. 베드로는 모든 성미술 작품들 속에서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자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특히 ‘열쇠’를 들고 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에게 건네 준 ‘하늘나라의 열쇠’를 상징한다.

 

예수는 베드로가 당신을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마태 16,19)이라고 말했다. 이로써 베드로 사도는 사도 중의 으뜸이자 첫 교황이 됐다.

 

반면 바오로 사도는 칼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죽었고, 이후 십자가가 그리스도를 상징하듯이, 교회는 전통적으로 순교할 때 사용된 무기를 그 순교자의 상징으로 여겼다. 바오로는 기둥에 묶인 채 칼로 참수를 당했다.

 

바오로에게 있어서 칼은 단지 무기에 그치지 않는다. 칼은 순교의 상징이자 하느님 말씀의 능력과 생명력을 나타낸다. 즉,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에페소 6,17)이기에 그가 전한 하느님의 말씀은 바로 그의 칼이었다.

 

 

대조적인 두 사도

 

두 사도는 대조적인 삶과 특징을 지닌다.

 

베드로는 가난한 어부였던 반면 바오로는 정통 유다인 가정에서 태어나 엄격한 율법 교육을 받은 바리사이였다. 변방의 시골에서 태어나고 자랐던 베드로와 달리 바오로는 찬란한 그리스 문화로 가득했던 대도시에서 로마의 시민으로 태어났다.

 

베드로는 인간적으로 나약하고 우유부단하며 의지가 박약했다. 예수의 가르침으로 많은 물고기를 잡은 베드로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자신은 죄가 많은 사람이니 자신을 떠나 달라고 청한다. 믿음이 부족해 호수에 빠지고, 예수가 처형되던 날에는 닭이 울기 전 세 번이나 스승을 부인한다.

 

바오로는 철저한 율법 교육을 받아 율법을 거스르는 것처럼 보였던 예수를 저주 받은 자로 여겼고, 당연히 그 제자들을 박해하는 데 앞장섰다. 바오로는 예수가 모세와 하느님을 모독(사도 6,11)한다고 생각했으며, 스테파노를 죽이는 일에 찬동했다.(사도 8,1) 모세와 율법을 거스르는 그리스도인들을 바오로는 용납할 수 없었다.

 

율법과 전통에 대한 두 사도의 사뭇 다른 태도는 급기야 충돌을 야기한다. 복음이 유다교의 울타리를 벗어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예수의 제자들조차 처음에는 유다교 회당을 떠나지 못했다.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은 할례와 율법 준수를 주장했으니, 이는 그리스도교의 복음 자체가 유다교를 거쳐서야 비로소 도달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율법을 넘어 이방인들에게로

 

복음이 유다교 전통과 관습의 울타리를 벗어나 이방인들에게 도달한 것은 바오로 사도를 통해서였다. 예루살렘 사도회의와 안티오키아 사건에서 충돌이 일어났다.

 

바오로 사도가 유다 율법에 얽매인 교회에 분노해 바르나바 등을 데리고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로 달려갔고, 사도들이 이를 논의하려고 모였다.(사도 15) 이 예루살렘 사도회의에서 바오로는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운 복음을 주장했다. 이방인들에게 율법이나 할례의 의무를 지우지 말고 교회 안에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격론 끝에 선교 영역을 분할해,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이방인들에게, 예루살렘 사도들은 할례 받은 이들을 대상으로 사도직을 수행하기로 했다.

 

안티오키아에서 다시 바오로와 베드로가 정면 충돌했다. 안티오키아에 머물던 베드로는 음식을 먹을 때, 이방인들과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였다. 유다교는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금했기 때문이다. 바오로는 이에 대해 위선적인 행위라며 격분했고, 성경의 기록에는 두 인물이 다시 만났다는 기록은 없다.

 

하지만 사도행전에는 베드로가 할례 받지 않은 로마인 백부장에게 세례를 베풀었다는 사실이 기록돼 있다. 베드로는 로마인 백부장 코르넬리우스의 집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이제 참으로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 주십니다.”(사도 10,34-35)

 

결국 베드로 역시 바오로와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계 모든 민족에게 열어 두었다는 것이다. 전통과 율법에 대해 긴장과 충돌이 있었지만, 두 사도는 똑같이 그리스도를 향해 있었다.

 

교회는 대조적인 두 사도의 축일을 같은 날 거행함으로써, 교회의 본질적인 모습, 신앙인들의 삶, 시대와 세상을 항해하는 교회의 모습이 지니고 있어야 하는 두 가지 방향성을 함께 제시한다. 전통과 율법은 그 자체로서 배척돼야 할 것이 아니다. 교회의 일치와 아름다운 전통을 수호하고 간직해야 하는 일과 경직된 율법에 얽매이지 않고 복음의 본질을 회복하고 자비롭고 자유로운 개방성을 유지해야 하는 일은 똑같이 중요한 일이다.

 

그리스도교 생활과 교리에는 이 두 가지 상반된 것처럼 보이는 방향성이 모두 스며 있다. 율법에 얽매이고 전통의 보존에만 관심을 두는 교회는 폐쇄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모습이 될 것이다. 무비판적이고 지나치게 자유방임적인 자세만 고수하는 집단은 귀중하고 올바른 전통의 무게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깊은 내적 일치를 해치지 않으면서도 상호 보완적인 두 방향 사이의 살아 있는 긴장이야말로 그리스도교를 형성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베드로와 바오로, 두 사도의 긴장된 관계와 다양성 속의 일치야말로 교회 생활을 바르게 이끄는 모범이다.

 

[가톨릭신문, 2020년 6월 28일, 박영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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