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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베드로(모방 베드로)(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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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명 나 베드로(모방 베드로) (羅 Peter(Maubant Peter))
축일 9월 20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신부, 순교자
활동지역 한국(Korea)
활동연도 1803-1839년
같은이름 나 베드로, 나백다록, 나베드로,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로, 페트루스, 피에르, 피터
성지와 사적지 게시판
제목 모방 신부의 삶과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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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0-11-16 조회수1399 추천수0

모방 신부의 삶과 신앙


1836년 조선 입국… 교우촌 돌며 왕성한 활동

 

 

모방신부 초상화(위), 모방 신부의 생가와 모방 신부가 세례받았던 바시성당 내부 모습(아래).

 

 

국내에 최초로 입국한 서양인 선교사 모방 신부. 한국인 성직자 양성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최양업 등 소년 세명을 뽑아 마카오로 보내는 등 한국교회를 위해 헌신하다 순교한 모방신부. 「군문효수」라는 극형을 선고받고 머나먼 이국땅에서 선종한 신부의 삶은 오늘을 사는 신앙인들을 숙연케 한다.

 

5월 13~ 15일 모방신부의 고향인 프랑스 바시와 첫 사목지 데제르 등지에서 열리는 시성 20주년 기념행사에 발맞춰 본보는 성인의 일생을 소개한다.

 

 

생애

 

모방신부는 1803년 9월 20일 노르망디 지방의 바이어교구 관할인 바시에서 태어났다. 바시는 사제나 선교사를 많이 배출한 유서깊은 신앙도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모방 신부는 출생한 날 바로 바시성당에서 「피에르」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이후 비르에서 중등교육과정을 이수한 모방 신부는 생 쉴피스 신학교 출신의 신부들이 지도하던 바이어교구 대신학교에 진학했다. 이 생 쉴피스 신학교는 파리외방전교회와 밀접한 관련이 있던 학교로 모방신부는 이 학교 출신의 교수 신부들에게 파리외방전교회의 활동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1829년 사제품을 받은 그는 비르의 북서쪽에 위치한 데제르본당의 보좌신부로 사목자로서의 첫 발을 내디딘다. 이듬해 비르의 남동쪽에 있는 샹뒤블본당 보좌신부로 부임한 모방신부는 이곳에서 선교의 소명을 느끼게 된다. 1831년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한 모방신부의 최초 선교 목적지는 베트남의 통킹이었으며, 최종 목적지는 중국의 사천성. 그러나 마카오에서 조선교회의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돼 부임하던 브뤼기에르 주교를 만나면서 목적지가 바뀌게 된다. 『조선에서 활동하고 싶다』는 간청이 받아들여져 브뤼기에르 주교와 함께 조선으로 향하게 된다. 그러나 1835년 갑작스런 병으로 브뤼기에르 주교는 사망하고, 1836년 1월 15일 모방성인은 5명의 조선 교우들과 함께 조선의 수도인 한양에 들어오게 된다.

 

 

입국과 전교활동

 

입국직후에 조선교회의 상황을 보고받은 모방신부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활동할 조선의 언어를 배우는데 온 힘을 기울이고자 했다. 그러나 새로 서양인 신부가 조선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아는 신자들은 모두가 고해성사를 받고 싶어 했기 때문에 모방신부는 언어를 배울만한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통역을 통해 고해성사를 하는 것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중국어나 한문을 모르는 신자들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신이 조금이라도 빨리 조선어를 습득해 신자들에게 직접 고해성사를 베풀고자 노력했다.

 

모방신부의 사목활동은 주로 전국 각지에 산재한 교우촌들을 순회 방문하는 것이었다. 순회 방문에서 모방 신부는 가는 곳마다 회장을 임명하거나 신자 집단을 새로 조직하는데 열중했으며, 주일과 축일에 신자들이 모이게 했다. 이 모임에서 공동으로 기도를 드리게 했고, 교리문답과 복음 성경, 성인 전기 등을 몇 대목 읽게 했으며, 회장이 낭독한 대목을 해석하게 했다.

 

모방 신부의 업적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조선 교회를 이끌어 갈 성직자를 양성하기 위해 신학생들을 선발, 마카오로 파견한 일일 것이다.

 

『조선에는 조선 신부가 있어야 해. 그러기 위해서는 신부가 될만한 사람을 골라야 하는데…』

 

모방 신부는 박해속에서도 목숨을 걸고 천주교 복음을 전할 조선인 신부의 자격 조건을 내걸었다. 첫째 때묻지 않은 소년일 것, 둘째 천주교 집안일 것, 셋째 신앙심이 깊은 사람으로서 본인은 물론 가족까지도 신부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 일 것, 넷째 건강하고 근면 할 것.

 

그런 조건으로 선발된 소년이 최양업(토마스)과 최방제(프란치스코), 김대건(안드레아) 이었다. 모방 신부는 이들에게 몇 달 동안 기초교육을 시킨 후 마카오로 보냈다.

 

1837년 1월, 두 번째로 조선으로 들어온 샤스탕 신부와 재회한 모방신부는 그와 함께 공소들을 방문했다. 1837년 12월 조선 교회는 제2대 교구장으로 앵베르 주교를 맞이하게 된다. 이로써 조선교회는 체계적인 교회조직을 갖추게 됐고, 모방 신부 입국 당시 6000여명이었던 신자수가 1838년 말에 가서는 9000여명으로 증가하게 된다.

 

 

순교와 시성

 

그러나 1839년 기해박해로 서소문과 새남터는 다시 한번 순교자들의 피로 물들게 됐다. 이미 체포된 앵베르 주교는 모방과 샤스탕 신부에게 자헌(自獻)할 것을 권고하였고, 이에 두 신부는 9월 6일 홍주 근처에 대기중인 포졸에게 자헌하였다. 서울로 압송돼 「대역 죄인」이란 판결을 받은 이들은 9월 21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했다. 당시 앵베르 주교의 나이는 43세,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는 35세로 동갑이었다.

 

이들 세 명의 시신은 3일 동안 백사장에 방치되다, 한강의 모래속에 묻혀버렸다. 그러난 20일쯤 지나 일부 신자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시신을 수습해 노고산(老姑山)에 안장했다. 이후 1843년 삼성산(三聖山, 관악산의 줄기)으로 이장됐으며, 1901년 시복 조사가 이루어지는 동안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에 의해 유해가 발굴되어 명동대성당 지하 묘지로 옮겨지게 되고, 1967년 시성작업이 추진되면서 다시 절두산으로 옮겨지게 된다.

 

이들은 1857년 가경자(可敬者)가 됐고, 1925년에 복자가 되었으며, 1984년 한국천주교 창립 200주년 때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한국순교자와 더불어 시성되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가톨릭신문사 - 한국순교자현양회 공동기획


모방 신부 시성 20주년 순례단 모집...5월 11~23일

 

 

모방 성인의 시성 20주년을 맞아 성인의 고향 프랑스 바시에서는 다채로운 현양 행사가 열린다. 이에 가톨릭신문사와 한국순교자현양회는 순례단을 구성해 모방성인의 현양(5월 13~15일)에 동참할 예정이다.

 

성인이 세례를 받은 바시성당과 성인의 생가, 첫 미사를 봉헌한 데제르성당과 선교사로 일생을 바칠 각오를 한 샹뒤불성당 등을 방문하고, 프랑스 전역에서 참가한 프랑스 신자들과 저녁만찬도 함께 하게 된다.

 

특히 프랑스인 가정에서 민박을 하며 바시 시장과 샹뒤불 시장이 직접 주관하는 환영식을 비롯 성령강림대축일 대미사 참례, 바시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축복식 참례 등으로 다채롭게 꾸민 순례의 여정은 또 다른 이국적인 감동을 선사할 것이 분명하다. 이와함께 성모성월에 펼쳐지는 이번 순례(5월 11~23일)에서는 루르드와 파티마 등 성모발현지도 둘러 볼 기회도 제공한다.

 

한국순교자현양회는 이미 지난해 10월 15~17일 펼쳐진 「성 앵베르 주교 시성 20주년 기념 현양 행사」에 순례단을 보내 프랑스 교회에 한국 신자들의 뜨거운 순교신심을 소개한 적이 있다.

 

연이은 한국교회 신자들의 방문에 감동받은 프랑스 교회는 답방 형식으로 올 10월 19~27일 순례단을 한국에 보낼 예정이다.

 

이 순례단에는 앵베르 성인을 배출한 엑상 프로방스 아를르 대교구의 교구장(끌로드 화이드 대주교)과 샤스탕 성인을 배출한 디뉴교구 교구장(프랑스와 하비에르 르와조 주교), 모방 성인을 배출한 리지외-바이어 교구의 교구장(삐강 주교) 등이 포함되어 있다.

 

※ 문의=(02)778-7671~3, (053) 256-5179

 

[가톨릭신문, 2005년 4월 17일, 장병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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