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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요한네스(Joannes, 또는 요한)의 정확한 탄생 연도는 알 수 없으나 대략 670년에서 680년 사이(자료에 따라서 650년에서 690년경까지 다양함)에 아랍계 그리스도인 가문 출신으로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서 태어났다. 635년 아랍 무슬림이 다마스쿠스를 정복해서 그가 태어났을 때는 이미 아랍인들이 다마스쿠스를 통치하고 있었다. 칼리프들은 다마스쿠스를 정복한 후 그리스도교와 유대교에 대한 관용 정책을 펼쳤다. 성 요한의 가문은 몇 세대에 걸쳐 국가 재정을 담당하는 고위 관리였고 그 직책은 세습제였다. 그래서 성 요한은 유아세례를 받고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의 전기에 따르면 부친이 직접 그를 교육하며 말 타는 법 등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 후 성 요한은 시칠리아 출신 수도승인 코스마스(Cosmas)의 제자가 되어 문법, 논리, 기하학 등 다양한 학문과 신학을 배웠다. 코스마스는 사실 무슬림에게 붙잡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끌려 온 전쟁 포로였는데, 그의 아버지가 거액을 주고 그를 자유의 몸으로 만들고 아들 성 요한과 고아에서 양아들로 받아들인 코스마스의 스승으로 삼았다. 성 요한은 청소년 시절에 훗날 칼리프가 된 야지드 1세(Yazid I, 680~683년 재위)와 교류하였고, 장성한 뒤에는 부친의 직업을 계승하여 국가의 중요한 관리가 되었다. 그는 궁중에서 직책을 수행하며 그리스도교적 덕행, 특히 겸손의 미덕으로 많은 이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그가 이토록 훌륭하게 성장한 것은 모두 그의 스승인 코스마스 수도승 덕분이었다. 그런데 후임 칼리프들이 들어서면서 그리스도교에 대한 관용 정책을 포기하자 그는 국가의 고위 관직을 더는 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직하고 아버지가 양자로 삼은 코스마스와 함께 예루살렘 근처에 있는 마르 사바(Mar Saba) 수도원으로 가서 수도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금욕 생활을 실천하며 성경과 교부 문헌 연구에 전념하였다. 또한 정통 신앙을 변론하고 백성을 교화하기 위해 많은 신학 작품을 썼을 뿐만 아니라 찬미가를 쓰는 데도 힘썼다. 그런데 수도승들 가운데는 성 요한과 코스마스 형제가 신학 논쟁을 수도원으로 끌어들이고 찬미가를 작곡하여 부르는 것에 대해 좋지 않게 보는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성 요한과 코스마스는 장상과 다른 수도승들의 냉대와 질시 속에서도 겸손하고 지혜롭게 처신하였다. 한편 예루살렘의 총대주교인 요한 5세(Joannes V)는 어려서부터 훌륭한 교육을 받고 신앙심 또한 깊은 그들을 알아보고 자신의 성직자로 삼고자 했다. 주교는 먼저 코스마스를 가자(Gaza) 근처 마주마(Majuma)의 주교로 임명하고, 성 요한에게도 사제품을 주어 예루살렘으로 불렀다. 하지만 교회 행정에 흥미가 없었던 성 요한은 얼마 뒤 수도원으로 돌아가 다양한 신학 서적과 찬가를 저술하는 데 헌신했다. 그리고 성상 파괴 논쟁이 극심하던 때에 끝까지 성상 공경의 정당성을 펼치며 요한 5세 총대주교와 다른 주교들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성상 공경과 관련해 전해지는 전설 중에 성상 파괴론자인 이사우리아 출신 레오 3세 황제(Leo III the Isaurian, 717~741년 재위)가 성상 공경을 옹호하는 성 요한에게 분노해 서기관에게 성 요한의 필체를 베껴서 칼리프를 전복하는 데 황제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편지를 쓰도록 했다. 그리고 황제는 위조된 편지를 칼리프에게 보내 성 요한을 반역죄로 처벌하도록 했다. 칼리프는 이 사건을 조사하거나 성 요한의 해명을 듣지도 않고 그의 오른손을 자르라고 명령했다. 성 요한은 감옥에 들어갈 때 갖고 간 성모 마리아 성화상 앞에서 고통 중에 오랫동안 기도하다가 잠이 들었다. 그런데 꿈속에 성모님이 나타나 그의 손을 다시 회복시켜 주었다. 칼리프는 이 기적을 확인한 후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고 하는데, 이 일화는 교훈적 목적으로 지어진 허구의 내용이다. 하지만 성 요한은 아랍인들이 635년 다마스쿠스를 정복한 후 무함마드(Muhammad)의 후계자인 칼리프들의 치하에서 전 생애를 보냈지만, 성 테오도로 스투디테(Theodorus the Studite, 11월 11일)와 더불어 교회의 정통 교리를 수호하고, 성상 공경 논쟁이 가장 극심하던 시기에 끝까지 성상 공경의 정당성을 펼쳤던 위대한 교부였다. 또한 그는 그리스 교부로서는 마지막 인물로 그리스도교적 아리스토텔레스 학풍을 개척했으며, 성 로마노 작곡가(Romanus the Melodist, 10월 1일)와 더불어 동방 교회에서 가장 유명한 시인 중 한 명이었다.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올바른 신앙에 관한 해설”(Expositio fidei, De fide orthodoxa)에서 그는 교회의 가르침, 곧 하느님과 창조, 인간론, 그리스도론, 마리아론, 성인 공경과 성화 공경, 구원론, 종말론 등을 100장에 걸쳐 다루었다. 이 저서는 서방 교회의 대표적 신학자인 성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월 28일)의 “신학대전”(Summa Theologiae)에 버금가는 역저로 동방 교회에서 받아들여지고 있고, 그에게 ‘동방의 토마스 아퀴나스’라는 별명을 부여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은 749년경 12월 4일 고령으로 선종해 마르 사바 수도원에 묻혔다. 1890년에 교황 레오 13세(Leo XIII)는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Johannes Damascenus)을 교회 학자로 선포하고 동방 신학자의 수호성인으로 추대하며 로마 보편 전례력에 포함했는데, 축일은 3월 27일로 지정하였다. 그래서 옛 “로마 순교록”은 3월 27일 목록에서 이날은 교회 학자이자 증거자인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의 축일인데, 5월 6일 목록에서 그에 대해 언급한다고 적었다. 그리고 5월 6일 목록에서 성덕과 학식으로 유명한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의 천상 탄일로, 그는 성상 공경을 옹호하며 저술과 설교로써 이사우리아 출신 레오 3세 황제에게 용감하게 맞서다가 황제의 명령으로 오른손이 잘렸으나 그 스스로 옹호했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성화상에 자신을 맡겨 다시 손이 온전하고 건강하게 회복되었다고 전해주었다. 1969년 전례력 개정 이후 그의 축일은 선종한 날로 알려진 12월 4일로 변경되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12월 4일 목록에서 사제이자 교회 학자인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은 거룩함과 학식으로 빛났으며, 성상 공경을 옹호하기 위해 레오 3세 황제에 맞서 말과 글로써 맹렬히 싸웠고, 예루살렘 근처 마르 사바 수도원에서 수도승이 된 후 죽는 날까지 그곳에서 성가를 작곡하는데 헌신했다고 하며, 이날 그의 시신이 안치되었다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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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호 | 성인명 | 제목 | 작성자 | 작성일 | 조회수 | 추천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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