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로마 순교록”은 7월 29일 목록에서 성 심플리치오(Simplicius)와 성 파우스티노(Faustinus) 형제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284~305년 재위)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로마의 신들에게 희생 제사 바치기를 거부해 체포되었고, 다양한 방법으로 모진 고문을 당하고 마침내 참수형을 받아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그들의 누이인 성녀 베아트릭스(Beatrix)도 감옥에서 목이 졸려 순교했다고 전해주었다. 그들은 “예로니모 순교록”(Martyrologium Hieronymianum)에서도 언급되었지만, 역사적 신뢰성을 기대할 수는 없다. 전설적 이야기에 따르면 잔인한 고문에 이어 참수된 형제의 시신이 로마의 테베레강(Tevere R.)에 던져졌고, 성녀 베아트릭스가 형제의 시신을 건져 포르토(Porto)로 가는 길에 있는 제네로사(Generosa) 카타콤바에 안장했다고 한다. 그 후 성녀 베아트릭스는 루치나(Lucina)라는 경건한 부인의 집을 피신처 삼아 함께 살면서 비밀리에 박해받는 그리스도인들을 도와주며 기도 생활에 전념하였다. 그러던 중 그녀의 재산을 노린 이교도 친척 또는 이웃인 루크레티우스(Lucretius)의 고발로 체포되어 재판관 앞으로 끌려가 이교도의 신상 앞에 희생제물을 바치도록 강요받았다. 그러나 성녀 베아트릭스는 완강히 버티며 “나는 그리스도인이기에 결코 우상에게 제사를 바칠 수 없다.”라고 용감하게 신앙을 고백했다. 결국 성녀 베아트릭스는 감옥 안에서 목이 졸려 순교하였다. 경건한 부인 루치나가 그녀의 시신을 수습해서 먼저 순교한 형제들 옆에 안장해주었다. 복자 야고보 데 보라지네(Jacobus de Voragine, 7월 13일)의 “황금 전설”(Legenda Aurea)에 따르면 루크레티우스는 형제의 토지를 탐낸 총독이었다. 형제의 재산을 빼앗아 이사한 후 친구들을 불러 성대한 연회를 베풀며 순교자들을 모독했을 때, 포대기에 싸여 있던 한 갓난아기가 그의 잘못을 지적하며 적의 손에 넘겨졌다고 큰소리로 외쳤다. 그로 인해 두려움에 떨던 루크레티우스는 악령에 사로잡혀 3시간 동안 극심한 고통을 받다가 연회 중에 죽었고, 이를 지켜본 참석자들이 많이 개종했다고 한다. 성 심플리치오와 성 파우스티노와 성녀 베아트릭스 남매의 유해는 7세기 말에 교황 성 레오 2세(Leo II, 7월 3일)에 의해 성녀 비비아나(Bibiana, 12월 2일)를 기념해 지은 성당으로 옮겨졌고, 나중에 다시 유해의 주요 부분이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Maggiore)에 안치되어 공경을 받고 있다. 한편 8세기에 성 보니파시오(Bonifatius, 6월 5일)가 독일에 풀다(Fulda) 수도원을 설립하면서 이들 형제의 유물을 모셔왔다. 16세기에 수도원을 중심으로 형성된 도시인 풀다는 이들 남매 순교자를 도시의 수호성인으로 정하고 그들을 세 개의 백합 형태로 도시의 인장과 문장에 묘사하였다. 1868년에 제네로사 공동묘지가 발굴되었는데, 그곳에서 발견된 프레스코화와 비문에는 이들 세 명의 남매 순교자뿐만 아니라 행적이 알려지지 않은 성 루포(Rufus) 순교자도 기록되어 있었다. 그래서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7월 29일 목록에서 세 명의 남매 순교자와 함께 성 루포 순교자의 이름을 추가하였다. 또한 전통적으로 알려진 성녀 베아트릭스/베아트리체(Beatrix/Beatrice)라는 이름도 비문에 적혀 있는 성녀 비아트릭스/비아트리체(Viatrix/Viatrice)로 수정하였다. 이는 사본을 만드는 과정에서 잘못 옮겨적어 생긴 일로 판단하고 있다. 성녀 ‘비아트릭스’는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을 타원형으로 둘러싼 열주 위에 세워진 140명의 성인 입상의 주인공 중 한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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