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볼프강은 독일 남서부 풀링겐(Pfullingen)의 백작인 슈바벤(Schwaben) 가문의 후손으로 어린 시절 가정에서 개인 교수에게 교육을 받고 이어서 라이헤나우(Reichenau) 대수도원과 뷔르츠부르크(Wurzburg)에서 수학했다. 그러고 나서 친구인 하인리히와 더불어 뷔르츠부르크와 트리어(Trier)의 대성당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의 친구인 하인리히가 956년에 트리어 교구의 대주교가 되자 친구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 학생들을 가르치며 교구 개혁과 교회 쇄신에 앞장서는 하인리히 대주교의 성실한 협력자가 되었다. 하인리히 대주교는 964년 선종하였다. 그 후 성 볼프강은 오랫동안 꿈꿔왔던 수도 생활을 실천하고자 아인지델른(Einsiedeln)의 베네딕토회에 입회하였다. 그의 뛰어난 학식과 영성을 알아본 수도승들이 그에게 가르침을 청하면서 그의 명성은 곧 나라 전체로 퍼져나갔다. 968년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의 성 울다리코(Uldaricus, 7월 4일)에게 사제품을 받고, 오늘날의 헝가리 지역인 판노니아(Pannonia) 지역까지 침략해 정착한 마자르족(중앙아시아 출신 유목민족)에 대한 선교 활동을 하던 중 972년 레겐스부르크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즉시 교구 내의 성직자와 수도원 개혁을 단행하는 한편 여러 지역을 다니며 선교 활동에 직접 참여하고 설교했으며, 특히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여 교구민으로부터 ‘위대한 자선가’로 높은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그는 황제를 수행하여 프랑스를 여행하였고, 바이에른(Bayern)의 공작의 아들로 후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성 헨리코 2세(Henricus II, 7월 13일) 공작의 개인교수로도 활약했다. 하지만 성 볼프강 주교를 시기한 이들의 모함으로 교구에서 물러난 그는 실망하기보다는 평소 소망했던 은수자의 삶을 살고자 한적한 곳을 찾아 떠났다. 오늘날 오스트리아의 잘츠카머구트(Salzkammergut) 지방에 있는 볼프강 호숫가에 성당을 짓고 말년을 보내고자 했다. 볼프강 호숫가에 있는 장크트볼프강(Sankt Wolfgang)이란 도시는 바로 성인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그리고 성인의 상징으로 도끼가 등장하는데, 전설에 의하면 볼프강 성인이 호숫가에 성당을 지을 장소를 찾을 때 산 아래로 도끼를 던져 정했다고 한다. 그는 오스트리아 북부를 여행하던 중 병에 걸려 린츠(Linz) 교외의 푸핑겐(Puppingen)에서 선종하였다. 1052년에 교황 레오 9세(Leo IX)에 의하여 성인품에 오른 후 장크트볼프강의 성 볼프강 성당은 주요 순례지가 되었고, 1481년 화가이자 조각가인 미하엘 파허(Michael Pacher)는 성 볼프강과 성 베네딕토 사이에서 성모 대관이 이루어지는 제단화를 제작했다. 그는 성 볼판구스(Wolfangus, 또는 볼판고)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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