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비르길리우스(또는 비르질리오)는 아일랜드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745년경 고향을 떠나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하려 했으나 사정상 프랑스 지역에 정착했다. 그는 잘츠부르크에서 수도자가 되었고, 후에 킴제(Chiemsee)와 잘츠부르크에 수도원을 설립했다. 그는 잘츠부르크의 성 베드로(Petrus) 수도원 원장으로 있을 때, 신학적인 문제로 독일의 사도인 성 보니파티우스(Bonifatius, 6월 5일)와 충돌했다. 세례성사와 원죄에 관련한 그의 주장에 대해 성 보니파티우스는 두 번이나 로마 교황청에 고발했다. 첫 번째 제소에서 교황 성 자카리아(Zacharias, 3월 15일)는 성 비르길리우스에게 유리한 판정을 내렸다. 하지만 두 번째 경우는 성 비르길리우스의 우주론적 주장이 교황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고 한다. 성 보니파티우스가 순교한 후 그는 잘츠부르크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성 비르길리우스는 학문에 조예가 깊은 성공적인 선교사였다. 그는 소금 광산을 개발해 잘츠부르크라는 도시를 건설하고 초대 교구장이 된 성 루페르투스(Rupertus, 3월 27일)가 세운 기초 위에 최초의 주교좌성당을 건축해 봉헌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 남부 케른텐(Kernten) 지방에 대한 선교에 큰 열정을 쏟았다. 그런 이유로 그는 케른텐 지역 교회의 창시자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784년 11월 27일 잘츠부르크에서 선종한 그는 1233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Gregorius IX)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는 베르길리우스(Vergilius)로도 불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