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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리쿰(도나우강 남부와 오스트리아 중부 및 바이에른 일부를 포함한 지역의 로마 시대 명칭)의 사도로 알려진 성 세베리누스(또는 세베리노)의 출생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5세기 초 이탈리아 로마(Roma)나 북아프리카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는 젊은 시절 동방의 모처에서 수도자로 생활한 듯하다. 그는 은수자의 고독한 삶과 선교사의 삶을 놓고 고민하던 중 훈족(Huns)의 왕 아틸라(Attila)가 453년에 죽고 아리우스파 추종자들에게 공격받는 노리쿰 지역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기로 했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노리쿰에 정착해 도나우강(Donau R.)을 따라 비엔(Vienne)에서 파사우(Passau)에 이르기까지 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파사우와 파비아네(Favianae)에 최초로 수도원들을 세웠다. 그는 종교에 무관심한 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들을 위한 자선 활동도 병행하였다. 서로마제국이 붕괴하는 시기에 그는 조직적으로 사람들을 이끌고, 군사적 방어를 도모하며, 포로들의 석방과 안전한 지역으로의 이주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이런 노력으로 인해 그는 게르만족의 족장인 오도아케르(Odoacer)를 비롯해 많은 이들로부터 폭넓은 존경을 받았다. 성 세베리노는 482년경 1월 8일 평화롭게 선종하여 자신이 설립한 수도원에 묻혔다. 488년 야만족의 침략으로 인해 오도아케르가 노리쿰 사람 일부를 이탈리아로 이주시킬 때 성 세베리노가 설립한 수도원의 수도자들도 그의 유해를 모시고 함께 따라갔다. 그의 유해는 먼저 이탈리아 북동부 해안가 도시인 리미니(Rimini) 근처에 모셨다가 교황 성 젤라시오 1세(Gelasius I, +496년, 11월 21일)의 허락을 받고 이탈리아 남서부 나폴리(Napoli) 근처 해안가에 있는 카스트룸 루쿨라눔(Castrum Lucullanum)으로 이장하였다. 그 후 그곳에는 그를 기념하는 수도원이 세워졌다. 그리고 10세기 초 이탈리아 남부 해안가를 공격하는 사라센인으로부터 그의 유해를 보호하기 위해 나폴리의 성 베네딕토회 수도원으로 옮겼고, 이 수도원은 그 후 그를 기념하여 산 세베리노(San Severino) 수도원으로 불리게 되었다. 옛 “로마 순교록”은 1월 8일 목록에서 노리쿰(지금의 오스트리아) 주민들 사이에서 복음을 전파하여 그 지방의 사도로 불리는 성 세베리노 수도원장이 있었는데,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그의 시신이 나폴리 근처 루쿨라눔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산 세베리노 수도원으로 이장해 모셨다고 전해주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같은 날 목록에서 오늘날 오스트리아에 속하는 도나우강 기슭 노리쿰 지방에 사제이자 수도자인 성 세베리노가 있었는데, 그는 훈족의 지도자인 아틸라가 죽은 후 이 지역으로 와서 무방비 상태에 놓인 주민들을 보호하고, 폭력적인 사람들을 교화하며, 이교도들을 개종시키고, 수도원을 세우며, 종교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헌신했다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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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호 | 성인명 | 제목 | 작성자 | 작성일 | 조회수 | 추천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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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세베리노(1.8 ...] | 성 세베리노: 노리쿰(오스트리아)을 하느님께로 인도 | 주호식 | 2012/01/08 | 294 |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