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수산나는 6세기에 기록된 전설적인 수난기(Passio)에 따르면 로마의 사제인 성 가비노(Gabinus, 2월 19일) 딸로 매우 아름다운 처녀였으며 교황 성 카이오(Cajus, 4월 22일)의 조카였다. 그녀는 아버지와 사촌 간인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로부터 자기 아들과 결혼하라는 요구를 뿌리쳤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결혼을 종용하라는 특명을 받고 파견되었던 궁중 관리인 성 막시모(Maximus, 2월 18일)와 성 클라우디오(Claudius, 2월 18일) 형제까지 개종시켰다. 그러자 분노한 황제는 성 막시모와 성 클라우디오 형제뿐만 아니라 성 클라우디오의 아내인 성녀 프레페디냐(Praepedigna, 2월 18일)는 물론 그들의 두 아들까지 체포해 고문하고 화형에 처한 후 강에 던져버렸다. 그리고 성녀 수산나와 그의 아버지인 성 가비노는 참수하였다. 그런데 성녀 수산나의 수난기는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교훈적인 목적으로 다양한 인물과 교황과의 일화 등을 추가한 허구에 가깝다고 보고 있다. 옛 “로마 순교록”은 8월 11일 목록에서 로마 귀족 가문 출신의 거룩한 동정녀인 성녀 수산나가 교황 성 카이오의 조카로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에 참수형을 당해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고 전해주었다. 역사적으로 성녀 수산나에 대해 많은 의문이 있었지만, “예로니모 순교록”에서 기록한 것처럼 성녀 수산나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목욕장 옆 ‘두 집 근처에서’(ad duas domos) 고문을 받다가 순교한 것은 확실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학자들은 그곳에서 발견된 묘비가 사제 성 가비노의 딸로 신앙을 고백하고 순교한 성녀 수산나의 무덤이 있었음을 알려준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무덤 위에 성녀 수산나를 기념하는 성당이 건립되었는데, 이 성당이 499년의 로마 교회 회의에서 성 카이오 성당으로 변경되었다가 595년 성녀 수산나 성당으로 그 명칭이 다시 바뀌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8월 11일 목록에서 로마에서 고대의 영광스러운 순교자 가운데 한 명으로 기념하는 성녀 수산나를 기념하기 위해 6세기에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목욕장 옆에 성 카이오라는 이름의 대성당이 하느님께 봉헌되었다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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