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스타니슬라우스(또는 스타니슬라오)는 1030년 7월 26일 폴란드 크라쿠프 교외에 있는 슈체파노프(Szczepanow)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신심 깊은 부모 덕분에 그는 어려서부터 그리스도교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그는 그니에즈노(Gniezno) 주교좌성당 부속 학교에서 교육받은 다음 파리에서 수학한 듯하다. 그리고 크라쿠프의 주교 람베르투스 줄라(Lambertus Zula)에게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교구 내 본당과 주교좌성당에서 사목자로 또 설교 사제로 활동하다가 총대리로 임명되었다. 그는 설교 사제로서 큰 명성을 얻었고 수많은 사람이 그에게 영적 지도를 받기를 청했다. 그러던 중 람베르투스 주교가 선종하자 교황 알렉산데르 2세(Alexander II)는 1072년에 그를 크라쿠프의 주교로 임명하였다. 주교가 된 뒤에도 그는 더욱 열정적으로 설교하고 엄격한 고행을 실천하며 사목 방문에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세속의 재물을 멀리하고 가난한 이들을 돕는데 전념했다. 그래서 주교관은 언제나 가난한 사람들로 가득 찼고, 부모가 돌아가신 후 물려받은 유산도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당시 폴란드를 다스리던 왕은 볼레수아프 2세(Boleslaw II)로 1069년 러시아에 대항해 일어난 키예프(Kiev) 전투에서 승리한 뛰어난 군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수많은 전쟁을 치르면서 무절제한 폭력과 범죄에 빠져들었고, 윤리적으로도 타락한 행동을 많이 자행하였다. 성 스타니슬라오는 누구도 왕에게 직언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성 요한 세례자(Joannes Baptistae, 6월 24일)가 헤로데 왕의 부도덕한 행동을 가차 없이 비판했던 것처럼, 국왕 볼레수아프 2세의 잔학성과 부도덕성을 용감하게 비판하였다. 그의 비판에 왕은 거짓으로 회개를 가장하기도 했으나 그 또한 오래가지는 못했다. 게다가 아름답다고 소문난 한 귀족 부인을 궁으로 납치하는 사건까지 발생하면서 귀족들의 분노를 사는 등 정치적 불안과 혼란마저 초래하였다. 하지만 누구도 감히 왕에게 맞서지 못했다. 그러면서 성 스타니슬라오는 왕의 죄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며 회개를 촉구하는 등 그동안 그의 모든 기도와 노력이 무위로 돌아가자 결국 공식적으로 왕을 파문하기에 이르렀다. 그가 국왕을 파문하고 대성당의 출입을 저지하자, 분노가 치민 볼레수아프 왕은 오히려 성 스타니슬라오 주교가 자신의 반대파와 모의해 모반을 일으키려 했다고 고발하였다. 그리고 1079년 4월 11일(또는 5월 8일) 성 스타니슬라오 주교를 살해하기 위해 부하들을 대동하고 크라쿠프의 성 미카엘 대성당으로 갔다. 부하들이 주저하자 왕은 미사를 봉헌하던 성 스타니슬라오 주교를 끌어내 직접 칼을 뽑아 살해하였다.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은 왕은 주교의 시신을 잔인하게 훼손하고 새와 짐승의 먹이로 들판에 던져버렸다. 그러나 네 마리의 독수리가 나타나 성 스타니슬라오의 시신을 지켰고, 이어서 사제들과 신자들이 그의 시신을 수습하였다. 그 후 1088년에 람베르투스 3세 주교가 그의 유해를 크라쿠프의 성 미카엘 성당으로 모셨다. 볼레수아프 왕은 성 스타니슬라오 주교를 살해한 일로 인해 교황 성 그레고리오 7세(Gregorius VII, 5월 25일)에 의해 파문되었고, 전국적인 분노가 이어져 폐위된 후 헝가리로 피신하였다. 결국 그는 오시아크(Osiak)에 있는 베네딕토회에서 여생을 참회자로 살다가 교황의 사면을 받았다고 한다. 성 스타니슬라오는 순교와 동시에 폴란드 국민의 상징으로 공경을 받았다. 1245년 그의 유해는 크라쿠프의 바벨 대성당(Wawel Cathedral)으로 옮겨 모셔졌고, 13세기 초부터 시성 절차가 시작되어 1253년 9월 8일 교황 인노첸시오 4세(Innocentius IV)에 의해 아시시(Assisi)의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에서 성인품에 올랐다. 그리고 다음 해 5월 8일 폴란드 각지에서 모인 고관들과 주교들이 참석한 가운데 크라쿠프에서 성대한 기념식이 거행되었다. 성 스타니슬라오는 폴란드 출신으로는 첫 번째로 시성되어 폴란드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교황 클레멘스 8세(Clemens VIII, 1592~1605년 재위)는 로마 보편 전례력 안에서 5월 7일에 그의 축일을 기념하도록 했고, 옛 “로마 순교록” 또한 5월 7일 목록에 그를 기록하였다. 그런데 폴란드 교회는 순교한 날로 추정되는 5월 8일에 그의 축일을 기념해왔다. 1969년 보편 전례력 개정과 함께 그의 축일은 일반적으로 그가 순교한 날로 여겨지는 4월 11일로 옮겨졌고,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 또한 4월 11일 목록에서 정의롭고 선한 목자로서 크라쿠프 교구를 다스리던 그가 볼레수아프 왕에 의해 미사 집전 중에 살해당했다고 기록하였다. 교회 미술에서 성 스타니슬라오는 베드로(Petrus)라는 한 신자를 소생시키는 모습으로 종종 표현된다. 이는 그가 계약서 없이 두 명의 증인만 배석한 채 베드로라는 한 신자에게 토지를 매입한 적이 있었는데, 자신에 대한 파문 경고에 화가 난 볼레수아프 왕이 그를 공격하기 위해 자손들을 부추겨 토지 반환 소송을 제기하도록 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미 3년 전에 사망한 상태였다. 왕은 증인들에게 위증을 강요해 성 스타니슬라오는 꼼짝없이 유죄 선고를 받을 위기에 놓였다. 그때 성 스타니슬라오는 재판관에게 사흘간의 말미를 주면 죽은 베드로를 법정에 세우겠다고 했고, 밤낮으로 단식하며 기도한 뒤 3일째 되던 날 무덤으로 가서 시신에 주교 지팡이를 대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일어날 것을 명하자 베드로는 죽음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법정에 가서 자신이 정상적으로 토지 대금을 받고 땅을 팔았음을 증언하고 자손들을 꾸짖었다. 이 모든 일을 마친 후 베드로는 다시 무덤으로 돌아갔다는 기적 이야기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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