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시몬은 1435-1440년 사이에 폴란드 남부의 리프니카 무로바나(Lipnica Murowana)의 한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인 그레고리우스(Gregorius)와 안나(Anna)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가치를 반영한 좋은 교육을 어떻게 그에게 해줄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들은 넉넉지 않은 가정 형편에도 불구하고 성 시몬을 안전하게 돌보고 적절한 교양을 쌓을 수 있도록 교육했다. 그는 부모의 뜻대로 신앙심 깊고 책임감 있는 본성을 갖고 성장했고, 타고난 성품의 풍요로움은 기도 생활과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 대한 사랑으로 기울도록 했다. 그는 1454년 유명한 야기엘론스키(Jagiellonski) 대학교에 다니기 위해 고향에서 멀지 않은 크라쿠프(Krakow)로 갔다. 바로 그 해에 카페스트라노(Capestrano)의 성 요한(Joannes, 10월 23일)이 크라쿠프에 와서 성덕과 열정적인 설교로 시민들을 감동시켰고, 젊은이들의 마음을 움직여 많은 이들을 작은 형제회의 성소자로 불러들였다. 1453년 9월 8일 카페스트라노의 성 요한은 3년 전에 시성된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누스(Bernardinus, 5월 20일)의 이름을 따서 크라쿠프에 첫 번째 엄률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수도원에 사는 작은 형제회 수사들을 ‘베르나르디니’(Bernardini)라고 불렀다. 1457년 젊은 청년 시몬은 작은 형제회의 이상에 매혹되어 복음서에서 언급된 가장 값진 진주를 얻기 위해 성공과 부유한 미래의 가능성을 뒤로하고 수도 생활을 선택하였다. 그는 다른 10명의 동료 학생들과 함께 크라쿠프의 스트라돔(Stradom) 구역에 있는 성 베르나르디누스 수도원에 입회를 청했다. 가르침과 성덕에 있어서 높은 명성을 지닌 바레세(Varese)의 크리스토포루스(Christophorus) 수련장 수사의 현명한 지도하에 성 시몬은 작은 형제회의 겸손하고 가난한 삶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리고 1460년경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작은 형제회 수사신부가 된 성 시몬은 폴란드 남동부 타르누프(Tarnow)의 작은 형제회 수도원에서 첫 번째 사도직을 수행하였다. 그 후 그는 크라쿠프의 스트라돔 구역에서 명백한 말씀으로 설교하고 충만한 열정과 신앙과 지혜를 가지고 끊임없이 자신을 헌신하여 확실히 자리를 잡았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와 성경에 대한 오랜 연구를 통해 가능했다. 그는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누스와 카페스트라노의 성 요한과 같이 ‘예수 성명’(Holy Name) 신심을 전파하는 데 주력하여 수없이 많은 죄인들의 회개를 이끌었다. 그는 1463년에 작은 형제회에서는 처음으로 크라쿠프의 바벨(Wawel) 주교좌성당에서 설교할 수 있는 직분을 받았다. 복음을 설교하는 그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인해 옛 자료들은 그에게 ‘가장 열렬한 설교자’(praedicator ferventissimus)라는 칭호를 부여하였다. 성 시몬은 자신의 설교에 영감을 주었던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누스를 존경하는 열망으로 몇몇 폴란드 동료들과 함께 1472년 5월 17일 성인의 이름으로 설립된 새 성당에 성인의 유해를 장엄하게 이장하는 행렬에 참가하기 위해 이탈리아의 아퀼라(Aquila)를 방문했다. 그리고 1478년에 파비아(Pavia)에서 열린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다시 이탈리아를 찾았다. 회의를 마친 다음 그는 로마로 가서 사도들의 무덤을 방문함으로써 자신의 가장 깊은 열망을 만족시켰고, 이어서 예루살렘 성지로 자신의 순례 계획을 연장하였다. 성 시몬은 만약 하느님께서 기뻐하신다면 영혼 구원을 위해 자신의 피를 흘리고 싶다는 열망을 간직한 채 참회의 정신과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진정한 사랑으로 예루살렘 순례에 나섰다. 그는 성지에 대한 사랑에 있어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10월 4일)를 본받고자 했다. 하느님의 백성에 대한 성 시몬의 사랑은 그의 생애 마지막 해에 크라쿠프에 유행성 전염병이 발발했을 때 비범한 방법으로 분명히 드러났다. 크라쿠프는 1482년 7월부터 1483년 1월 6일까지 유행성 전염병의 대재난에 직면했었다. 성 베르나르디누스 수도원의 작은 형제회 수사들은 진정한 위로의 천사로서 병자들을 돌보기 위해 쉼 없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성 시몬은 애덕을 실천하고 봉헌된 삶을 완성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을 잡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어느 곳이든 찾아가서 병자들을 위로하고 성사를 집전하며 죽어가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위로를 전해주었다. 그러다가 그 역시 전염병에 걸리고 말았다. 그는 놀라운 인내로써 질병의 고통을 견뎌냈고, 임종이 가까워지자 모든 이들이 자신을 밟고 지나갈 수 있도록 성당 문지방 아래 묻어달라는 소망을 표현하였다. 1482년 7월 18일, 전염병에 감염된 지 6일째 되던 날 그는 죽음의 두려움도 없이 자신의 눈을 십자고상에 고정한 채 하느님께 자신의 영혼을 돌려드렸다. 성 시몬에 대한 공적인 공경은 1685년 2월 24일 교황 복자 인노켄티우스 11세(Innocentius XI)에 의해 승인되었고, 공식적인 시성 절차는 1948년 6월 25일 교황 비오 12세(Pius XII) 때 시작되었다. 그의 영웅적인 덕행과 전구를 통해 1943년 크라쿠프에서 일어났던 기적적인 치유가 사실로 드러나자 2005년 12월 19일과 2006년 12월 16일에 교황 베네딕투스 16세(Benedictus XVI)는 이를 공식적으로 확인하였다. 그리고 2007년 6월 3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다른 세 명의 복자들과 함께 시성식을 갖고 성인으로 선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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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 성인명 | 제목 | 작성자 | 작성일 | 조회수 | 추천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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