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알베르투스(Albertus, 또는 알베르토)는 1166년 벨기에 중부 브라반트(Brabant) 지방 루뱅의 백작 고드프리 3세(Godfrey III)와 그의 첫 번째 아내인 림부르크(Limburg)의 마르가리타(Margareta) 사이에서 두 아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형은 브라반트의 백작 앙리 1세(Henry I)이다. 그의 어머니는 지금은 몽-세살로 불리는 자기 부친의 성을 그에게 주었고, 이 성은 현재 베네딕토 수도원으로 유명하다. 좋은 집안 덕분에 최고의 교육을 받고 성장한 그는 젊은 나이에 리에주(Liege)의 시의원으로 임명되었으나, 21살이 되던 1187년 예루살렘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신이 누리던 모든 혜택과 지위를 물리치고 기사가 되어 십자군에 가담했다가 성직자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1191년 리에주의 주교가 사망하자 부제이던 성 알베르투스가 교회법적으로 주교가 될 수 있는 연령(30세) 미달임에도 불구하고 주교로 선출되었다. 그의 선출에 대해 대부분은 인정했지만 일부 세력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그는 리에주의 주교직을 사임한 후 이 문제를 들고 로마의 코일레스티누스 3세(Coelestinus III) 교황에게 갔다. 1192년 교황은 그의 선출이 유효하다고 판단하고 그를 추기경에 임명했다. 그는 연이어 사제품과 주교품을 받은 후 랭스(Reims) 주교좌성당에서 9월 21일 첫 미사를 봉헌했다. 그리고 11월 24일, 그는 자신과 함께 랭스 교외로 말을 타고 나가자는 세 명의 독일 기사들을 만났다. 그들과 도시 밖으로 나가자 기사들을 돌변해 칼을 뽑아 그를 살해하고 도망갔다. 그의 죽음은 곧 정치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고, 그의 명성은 더욱 널리 퍼져나가며 순교자로서 공경을 받게 되었다. 1613년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는 그를 성인품에 올리며 그가 살해된 날을 축일로 지정했는데, 지역에 따라서는 11월 21일에 그의 축일을 기념하기도 한다. 그의 유해는 1921년 브뤼셀(Brussels)로 옮겨지기 전까지 랭스에 모셔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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