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에드문두스 애로스미스(Edmundus Arrowsmith, 또는 에드문도 애로스미스)는 잉글랜드의 헤이독(Haydock)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브라이언(Brian)이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견진성사 때 받은 에드문도라는 이름을 즐겨 사용하였다. 그의 집안은 가톨릭 신앙을 지키기 위해 많은 고난을 겪었다. 할아버지가 감옥에서 신앙을 증거하다 순교하고, 부모 또한 감옥에 갇히면서 그와 형제들은 이웃들의 돌봄을 받기도 했다. 1605년 성 에드문도 애로스미스는 사제가 되기 위해 잉글랜드를 떠나 프랑스의 두에(Douai)에 있는 영국 신학교에 들어갔다. 건강상의 문제로 잉글랜드로 돌아왔다가 회복한 후 다시 두에로 가서 공부를 마치고 1612년 아라스(Arras)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그리고 다음 해에 곧바로 영국 선교 길에 나섰다. 그는 1622년까지 별다른 어려움 없이 랭커셔(Lancashire)의 가톨릭 신자들을 사목하였다. 그러다가 그는 체스터(Chester)의 영국 성공회 주교에게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다. 제임스 1세(James I) 국왕이 체포된 모든 사제를 풀어주라는 명을 내림에 따라 석방된 후 그는 1624년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근친결혼을 주례했다는 한 청년의 밀고 때문에 1628년에 다시 체포되어, 가톨릭 사제로서 유죄 판결과 더불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그해 8월 28일 랭커스터(Lancaster)에서 교수형과 극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의 유해 중 일부인 손은 시복식 전까지 애로스미스 가문에 의해 보존되었다. 현재는 그레이터 맨체스터(Greater Manchester)의 애슈턴인마커필드(Ashton-in-Makerfield)에 있는 성 오스왈도와 성 에드문도 애로스미스 가톨릭 성당에 모셔져 있다. 성 에드문도 애로스미스는 1929년 12월 1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70년 10월 25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40위 순교자’(The Forty Martyrs of England and Wales)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그의 축일은 개인적으로는 순교한 날인 8월 28일에 기념하고, 시성 후에는 40위 순교자의 일원으로서 시성일인 10월 25일에 기념해 왔었다. 2000년 잉글랜드와 웨일스 교회의 새 전례력이 교황청에서 승인된 이후 40위 순교자들의 축일은 5월 4일로 옮겨져 종교개혁 시대에 순교한 모든 복자 · 성인들과 함께 ‘영국의 순교자’(The English Martyrs)라는 이름으로 전례 안에서 기념하고 있다. 이날은 종교개혁 시대 영국에서 순교한 영국 성공회의 순교자와 성인들의 기념일과 같은 날이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8월 28일 목록에서 영국 랭커스터에서 예수회 신부인 성 에드문도 애로스미스가 많은 이들을 가톨릭 신앙으로 이끌다가 체포되어 찰스 1세 왕 치하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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