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에드문두스 캠피언(Edmundus Campion, 또는 에드문도 캠피언)은 1540년 1월 25일 영국 잉글랜드의 런던(London)에서 한 서적상의 아들로 태어나 가톨릭 신자로 성장했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그는 1553년 8월 3일 여왕 메리 튜더(Mary Tudor)의 런던 입성을 환영하는 연설문을 낭독하기도 했다. 그는 불과 15세의 나이에 장학금을 받고 옥스퍼드(Oxford)의 세인트 존스 대학(St. John’s College)에 들어갔다. 그의 명석한 두뇌는 그 당시 석학이었던 레스터(Leicester)의 얼(Earl), 로버트 세실(Robert Cecil), 심지어는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여왕까지도 놀라게 할 정도였다. 그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영국 교회에 대한 지상권(至上權)을 승인하는 선서(Oath of Supremacy)를 하고 1564년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영국 성공회의 부제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사제품을 준비하며 교부들의 문서를 공부하던 중 가톨릭교회의 가르침 안에서 신앙의 진리를 깨달으면서 내적인 갈등을 겪고 가톨릭 신앙으로 돌아섰다. 그는 1569년에 옥스퍼드를 떠나 아일랜드로 건너가 공부를 이어갔다. 교황 성 비오 5세(Pius V, 4월 30일)가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을 단죄하면서 영국 내에서 가톨릭 신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1571년 6월 성 에드문도 캠피언은 비밀리에 아일랜드를 떠나 프랑스 북부 두에(Douai)에 있는 가톨릭 신학교인 영국 대학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신학을 공부하면서 가톨릭교회와 화해하고 그동안 부인했던 성체성사에 참여했다. 1573년 1월 학위를 받은 후 그는 예수회에 입회하기 위해 로마로 떠났고, 그해 4월 입회 허락을 받았다. 그 당시만 해도 예수회가 아직 영국에 진출하기 전이라 그는 오스트리아 관구로 가서 프라하(Praha)와 브르노(Brno) 공동체에서 수련기를 보냈다. 그 후 부제품을 받고 나서 1578년에 프라하의 대주교에게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첫 서원 이후 6년 동안 프라하의 예수회 대학에서 수사학과 철학 교수로 활동했다. 1579년 예수회의 영국 진출이 확정되자 그는 1580년 3월 프라하에서 출발해 로마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로버트 퍼슨스(Robert Persons) 신부와 동료들을 만나 잉글랜드로 가는 첫 번째 예수회 선교단의 일원이 되어 6월 24일 런던에 도착했다. 그의 존재는 곧 가톨릭 신자뿐만 아니라 당국에도 알려졌다. 런던에 잠시 머무는 동안 그는 자신이 잉글랜드로 돌아온 것은 정치적 목적이 아닌 종교적 목적이라는 취지의 선언문(Campion’s Brag)를 작성해 신자들의 힘을 북돋아 주었다. 그는 주로 버크셔, 옥스퍼드셔, 랭커셔, 요크셔 등지에서 활동했다. 1581년 5월 그는 “열 개의 이유들”(Decem Rationes)이란 책을 출판하기 위해 잠시 런던에 들렀다가 7월에 다시 런던을 떠났다. 그는 노퍽(Norfolk)으로 가던 중 잠시 옥스퍼드 근교 라이포드 그레인지(Lyford Grange)에서 사목활동을 하다가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7월 22일 런던탑에 갇힌 그는 가톨릭 신앙을 버릴 마지막 기회를 준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제안을 거절하고 극심한 고문을 받았다. 그해 11월 그는 웨스트민스터 홀(Westminster Hall)에서 ‘로마와 랭스 음모 사건’(Rome and Rheims Plot)에 가담한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고 반역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 음모는 사실이 아니라 조작된 것으로 로마와 랭스에서 가톨릭 관련자들이 선동을 일으켜 여왕을 폐위시킬 계획을 세웠다는 것이었다. 그는 1581년 12월 1일 런던의 타이번(Tyburn)으로 끌려가 성 알렉산데르 브라이언트(Alexander Bryant)와 성 랄프 셔윈(Ralph Sherwin) 신부와 함께 교수형과 극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성 에드문도 캠피언 신부는 1886년 12월 29일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70년 10월 25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40위 순교자’(The Forty Martyrs of England and Wales)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그의 축일은 개인적으로는 순교한 날인 12월 1일에 기념하고, 시성 후에는 40위 순교자의 일원으로서 시성일인 10월 25일에 기념해 왔었다. 2000년 잉글랜드와 웨일스 교회의 새 전례력이 교황청에서 승인된 이후 40위 순교자들의 축일은 5월 4일로 옮겨져 종교개혁 시대에 순교한 모든 복자 · 성인들과 함께 ‘영국의 순교자’(The English Martyrs)라는 이름으로 전례 안에서 기념하고 있다. 이날은 종교개혁 시대 영국에서 순교한 영국 성공회의 순교자와 성인들의 기념일과 같은 날이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12월 1일 목록에서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치하에 예수회의 성 에드문도 캠피언, 성 랄프 셔윈, 성 알렉산데르 브라이언트 신부가 가톨릭 신앙 때문에 많은 고문과 고통을 당한 후 런던의 타이번에서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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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에드문도 캠피언 ...] | 예수회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성 에드먼드 캠피언 | 주호식 | 2018/01/01 | 641 |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