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자 에드워드 파월은 영국의 웨일스(Wales)에서 태어나 옥스퍼드 대학(University of Oxford)에서 문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1495년에 오리엘 대학(Oriel College)의 연구원이 되었다. 그는 1506년에 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사제이자 신학자로 명성이 높았던 그는 1523년에 마틴 루터(Martin Luther)를 반박하는 글을 써서 출판했는데, 옥스퍼드 대학은 헨리 8세(Henry VIII)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의 저작을 ‘대학의 영광’이라고 칭송했다. 그뿐 아니라 솔즈베리(Salisbury)의 주교로부터 큰 칭찬을 받을 만큼 비중 있는 논문이었다. 이러한 높은 명성으로 인해 그는 헨리 8세 국왕의 결혼 무효소송에 있어서 캐서린(Catherine of Aragon) 왕비 측 네 명의 법률가 중 하나로 뽑혔다. 그는 1529년 4월부터 시작된 회의에서 왕의 이혼 주장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하고 그 이유를 설명하는 책을 펴냈다. 그의 놀라운 이론과 웅변은 헨리 8세 측의 미움을 샀다. 1534년 헨리 8세 왕이 교황 클레멘스 7세(Clemens VII)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캐서린 왕비와 이혼하고 왕비의 시녀였던 앤 불린(Anne Boleyn)과 재혼하자 그는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그해 11월 그는 왕의 영국 교회에 대한 최고 수위권을 법률화한 수장령(Act of Supremacy)에 따라 앤 불린과의 재혼을 인정하는 계승권 승복 선서(Oath of Succession)를 거부한 반역죄로 모든 혜택을 박탈당한 채 런던탑에 갇혔다. 보석도 허용되지 않는 상태에서 그에 대한 사형 집행은 6년 동안이나 집행되지 않았고, 같은 죄목으로 런던탑에 갇힌 복자 토마스 아벨(Thomas Abel) 신부와 복자 리카르도 페더스톤(Richard Fetherstone) 신부와 함께 오랫동안 고통을 받았다. 결국 1540년 7월 30일, 복자 에드워드 파월과 두 명의 동료 신부는 국왕의 수장령에 끝까지 반대하여 런던 중심부에 있는 스미스필드(Smithfield)로 끌려가 교수형과 극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복자 에드워드 파월 신부는 1886년 12월 29일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순교한 날인 7월 30일에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그리고 2000년에 잉글랜드와 웨일스 교회의 새 전례력이 교황청에서 승인된 후에는 1970년 10월 25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성된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40위 순교자’(The Forty Martyrs of England and Wales)와 종교개혁 시대에 순교한 모든 복자 · 성인들이 ‘영국의 순교자’(The English Martyrs)라는 이름으로 5월 4일 전례 안에서 기념하게 되면서 에드워드 파월 또한 그날 함께 축일을 기념하게 되었다. 이날은 종교개혁 시대 영국에서 순교한 영국 성공회의 순교자와 성인들의 기념일과 같은 날이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7월 30일 목록에서 신부이자 신학 박사인 복자 에드워드 파월과 동료들이 헨리 8세가 요청한 이혼에 반대하고 끝까지 로마 교황에 대한 충성을 지키다가 영국 런던의 스미스필드에서 교수대에 매달려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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