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의 왕이자 순교자인 성 에리크 9세(Erk IX)는 1125년경 스웨덴의 귀족 예드바르드(Jedvard)와 세실리아(Cecilia)의 아들로 태어나 에리크 예드바르손(Erik Jedvardsson, ‘예드바르의 아들 에리크’라는 뜻)이란 이름을 얻었다. 그는 스웨덴의 국왕이었던 잉게(Inge the Elder)와 헬레나(Helena)의 손녀인 크리스티나 비욘스도터(Kristina Bjornsdotter)와 결혼하였다. 그는 1150년에 스웨덴 남동부 웁살라(Uppsala) 주변 지역인 우플란드(Uppland)의 왕이 되었고, 1156년 스웨덴의 왕인 스베르케르 1세(Sverker I)가 성탄절 미사에 가던 중 마부에 의해 살해된 후 웁살라에서 그의 후계자로 선출되어 스웨덴 전체의 왕으로 인정받았다. 전승에 따르면 성 에리크는 독실한 그리스도인으로 매우 금욕적인 사람이었다. 그가 늘 입었던 말총으로 만든 셔츠는 오랫동안 웁살라 대성당에 유물로 보관되어 있었다. 그는 검소하게 살면서 왕으로서 마땅히 받아야 할 수입의 일부를 포기하여 그 돈으로 감라 웁살라(Gamla Uppsala, ‘구[舊] 웁살라’라는 뜻)에 스웨덴 최초의 대성당을 건설하였다. 당시 스웨덴은 덴마크와 노르웨이보다 늦게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였는데, 여전히 그들의 문화와 생활 방식 안에는 이교도의 관습이 깊이 뿌리 내려 있었다. 이교 신전에는 우상이 있었고, 신성한 숲에서는 인신 공양과 동물을 바치는 제사가 거행되었다. 그래서 성 에리크는 재위하는 동안 그리스도교 신앙을 널리 전하고 더욱 공고히 하고자 노력했다. 또한 그는 왕국의 오래된 법률과 규정을 모아 집대성했는데, 이는 ‘에리크 왕의 법률’ 또는 ‘우플란트 법전’으로 알려졌다. 여기서 그는 기혼 여성이 재산을 공유해야 한다는 조항을 창시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고, 이 조항은 그 이후로도 법전에 포함되어 여성의 권리를 보호하는 기초가 되었다. 그의 통치 중에 가장 큰 사건은 핀란드(Finland) 십자군 전쟁이었다. 당시 핀란드는 스웨덴 동쪽 끝에 있는 속주였는데, 이교도인 그들이 스웨덴을 침략하자 이에 맞서 원정을 준비하며 ‘십자군 전쟁’이라고 명명하였다. 그는 국경 지역에서 스웨덴의 이익을 강화하는 동시에 선교 활동을 위해 그의 충실한 협력자이자 친구였던 웁살라의 성 헨리코(Henricus, 1월 20일) 주교와 함께 출발하였다. 1154년과 1156/7년에 핀란드에 맞서 십자군 전쟁을 벌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성 에리크는 먼저 핀란드인들에게 평화와 그리스도교 신앙을 제안했는데, 그들이 둘 다 거부하자 세례도 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적들을 애도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성 헨리코 주교는 핀란드에 남아 그들의 복음화를 위해 헌신하다가 1157년경 교회의 규율을 거부한 살인자에 의해 잔혹하게 살해되어 순교자로서 공경을 받았다. 성 에리크는 유럽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교회 재정을 위해 십일조를 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에 불만을 품은 귀족들이 덴마크의 왕자인 마그누스 헨릭손(Magnus Henriksson)의 편에 가담하였다. 당시 스웨덴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덴마크는 팽창주의적 야망을 갖고 있었다. 핀란드 원정에서 돌아온 후 성 에리크가 외스트라 아로스(Ostra Aros, 오늘날의 웁살라)에 있는 거룩한 삼위일체 성당에서 주님 승천 대축일 미사에 참례하던 중 마그누스 헨릭손 왕자가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미사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으나 이미 방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적에게 사로잡혀 온갖 조롱과 고문을 당한 후 목에 칼이 찔려 사망하였다. 그의 시신은 감라 웁살라 대성당에 묻혔고, 성 에리크의 아들인 크누트 에릭손(Knut Eriksson)이 망명에서 돌아와 1167년 왕권을 되찾은 후 그해 5월 18일 아버지의 유해를 대성당 내 성소에 장엄하게 안치하며 교황 알렉산데르 3세(Alexander III)에게 시성을 요청하였다. 덴마크의 거짓 주장 등으로 인해 공식적으로 그의 시성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스웨덴의 수호자이자 대표적인 성인으로 일찍이 큰 공경을 받았다. 1245년경 감라 웁살라의 대성당이 화재로 대부분 파괴되고 주교좌가 오늘날의 웁살라인 외스트라 아로스로 옮겨지면서 1271년 새로운 대성당이 성 에리크가 마지막으로 미사에 참례했던 삼위일체 성당 자리에 건립되었다. 그리고 1273년 1월 24일 성 에리크의 유해를 감라 웁살라에서 들판을 가로질러 새 대성당으로 장엄하게 이장하였다. 성 에리크는 스웨덴의 국민 영웅이자 성인으로 공경받았고, 새로 즉위하는 모든 왕은 그의 유해함에 손을 얹고 선서를 했다. 옛 “로마 순교록”은 5월 18일 목록에서 스웨덴의 웁살라에 왕이자 순교자인 성 에리크가 있었다고 전해주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같은 날 목록에서 스웨덴의 왕이자 순교자인 성 에리크 9세가 통치 중에 국민을 현명하게 통치하고 여성의 권리를 보호하는데 헌신했으며,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성 헨리코 주교를 핀란드로 파견했고, 마침내 웁살라에서 미사에 참례하던 중 적의 공격을 받아 칼에 찔려 죽었다고 기록하였다. 성 에리크는 라틴어로 성 에리쿠스(Ericus, 또는 에리코)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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