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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제아리오(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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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성인명 엘제아리오 (Elzear)
축일 9월 27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3회원
활동지역
활동연도 1285?-1323년
같은이름 엘제아리우스, 엘지아르, 엘지알
성인 기본정보

   사브랑(Sabran)의 성 엘제아리우스(Elzearius, 또는 엘제아리오)는 프로방스(Provence) 지방 앙주이(Ansouis)에서 그리 멀지 않은 로비앙(Robians)의 부친 성에서 태어났고, 모계의 영향을 많이 받은 그는 마르세유(Marseilles)의 성 빅토르(Victor) 수도원의 원장인 사브랑의 빌리암(William)으로부터 교육받고 성장하였다. 수도원장은 그의 아저씨였는데 매우 엄격한 교육을 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그는 영적 지도자의 영향을 받아 작은 형제회 제3회 회원이 되었고, 1299년에 소유권 및 정치적인 입지를 고려해서 같은 프로방스의 귀족 가문의 딸인 델피나(Delphina, 12월 9일)와 결혼하였다. 알프스맥 저지대에 위치한 퓌미셸(Puimichel) 성에서 태어난 델피나는 당시 15세였다. 이들 부부는 처음에는 앙주이에서 살다가, 곧 퓌미셸 성으로 옮겨 와 살았다. 그들은 서로에 대하여 지극한 신뢰와 사랑을 지녔으며, 델피나는 남편을 따라 작은 형제회 제3회 회원이 되었다. 또한 신심이 두터웠던 그들은 서로 합의하에 동정을 지키기로 서약하였다.

   이러한 생활 속에서 이 거룩한 부부는 관상과 기도를 중심으로 사회활동을 하였으며, 선행과 애덕 실천에서 남다른 모범을 보이며 삶으로써 주위의 귀감이 되었다. 성 엘제아리우스는 매일같이 성무일도를 바쳤다. 그의 나이 23세 때에 부친의 명예와 유산을 받게 되었을 때 그는 이에 따르는 온갖 위험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열렬한 신심과 지혜로써 세속적인 재물을 다스렸다. 또한 그는 국왕의 부름을 받고 궁중의 일을 돌보기도 하였는데, 왕의 부탁으로 파리(Paris)에 대사로 갔다가 중병을 얻어 1323년 9월 27일 사망하였다. 사망하기 전에 그는 즉시 총고백을 하고 그리스도의 수난사를 매일 묵상함으로써 온갖 고통을 이겨냈다. 노자성체를 영하면서는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이것이 나의 희망 전부였다.” 그는 자신의 고해신부인 어느 작은 형제회 회원의 팔에 안겨 영광된 삶을 마쳤다.

   1309년경에 그는 자신의 조카인 그리모아드의 빌리암의 대부를 섰는데, 빌리암은 나중에 우르바누스 5세(Urbanus V) 교황이 되었고, 1369년 4월 15일 자신의 대부인 엘제아리우스를 시성하였다. 한편 델피나는 남편과 사별한 뒤 37년을 더 살았는데, 그녀는 그 동안에 나폴리(Napoli)의 '성녀 클라라의 가난한 자매 수도회'의 수녀가 된 나폴리 여왕 산치아(Sanchia)와 함께 죽을 때까지 수녀원에서 살았다. 그녀와 여왕은 절친한 사이였다. 델피나는 대부분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며 많은 자선을 베푸는 등 은수자처럼 생활하다가 1360년에 사망하였다. 델피나는 1363년부터 시성 절차가 진행되었으나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 1791년 델피나의 유해는 앱트(Apt)에 있는 작은 형제회 성당에 남편의 유해와 나란히 안치되었다.

참고자료

  •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9권 - '엘제아리오와 델피나',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2002년, 6077-6078쪽.

사진/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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