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요한네스 드 라랑드(Joannes de Lalande, 또는 요한 드 라랑드)는 프랑스 북부 디에프(Dieppe)에서 태어났다. 그는 1642년 이전에 정착민으로 뉴프랑스(캐나다)에 도착한 젊은이였다. 그는 ‘도네’(Donne)라는 하는 예수회를 돕는 평신도 보조자가 되어 예수회의 선교사업을 돕고 하느님께 자신의 생애를 봉헌하고자 했다. 도네는 선교사를 돕는 평신도 협조회원으로서 예수회원과 똑같이 장상에게 순명하고 무보수로 일하며 평생을 독신으로 살겠다는 약속을 했다. 8명의 캐나다 순교자 중에 성 르네 구필(Rene Goupil)도 그와 같은 도네였다. 이로쿼이족(Iroquois)의 일파인 모호크족(Mohawks)에게 붙잡혀 1년 이상 노예로 살다가 기적적으로 탈출해 프랑스로 돌아갔다가 1644년 6월 다시 퀘벡으로 돌아온 성 이사악 조그(Isaac Jogues) 신부는 여전히 모호크족에 대한 선교 열망을 지니고 있었다. 마침 모호크족이 속한 이로쿼이족과 프랑스 사이에 평화 조약이 체결되면서 1646년 9월 24일 성 이사악 조그가 프랑스 대사 자격으로 대표단을 이끌고 퀘벡을 떠나 이로쿼이족 영토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때 그의 평신도 보조자로 성 요한 드 라랑드가 함께 가게 되었는데, 출발에 앞서 성 이사악 조그 신부는 그에게 선교사 생활의 어려움에 관해 설명해주었다. 포로가 되거나 고문을 당하거나 심지어 죽을 수도 있다고 했지만 성 요한 드 라랑드는 순교하더라도 끝까지 그와 함께하겠다고 약속했다. 성 이사악 조그 신부와 성 요한 드 라랑드 일행이 퀘벡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호크족이 다시 전쟁에 나섰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일행으로 함께 가던 휴런족 인디언 대부분은 겁을 먹고 당시 무역 중심지인 세 개의 강(Three Rivers) 지역으로 돌아갔다. 두 선교사와 인디언 한 명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목적지인 오세르네논(Ossernenon, 오늘날 미국 뉴욕주의 오리스빌[Auriesville])을 향해 배를 저어 10월 17일 도착했다. 하지만 여전히 일부 모호크족은 수많은 인디언을 희생시킨 천연두 전염병의 원인이 ‘검은 옷’을 입은 예수회 선교사들 때문이라고 비난했고, 그 분노의 화살을 막 도착한 성 이사악 조그와 성 요한 드 라랑드에게 돌렸다. 결국 성 이사악 조그 신부는 또다시 모호크족에게 붙잡혀 칼로 난자당한 후 마지막으로 토마호크 도끼로 머리를 쳐 죽이는 잔인한 형벌을 받고 도착 다음 날인 10월 18일 순교하였다. 그리고 다음 날 안전한 오두막에 피신해 있던 성 요한 드 라랑드는 성 이사악 조그 신부의 시신이나 유품을 수습해서 돌아가려고 은밀히 나갔다가 모호크족의 도끼에 맞아 순교하였다. 모호크족은 이들 순교자의 시신을 모호크강(Mohawk R.)에 버리고 그들의 머리는 마을 방어벽에 매달았다. 성 요한 드 브레뵈프 신부와 성 요한 드 라랑드를 포함한 7명의 동료 순교자들은 1925년 6월 21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30년 6월 29일 로마에서 같은 교황에 의해 ‘캐나다의 순교자’(수호성인) 또는 ‘북미의 첫 순교자들’로서 성인품에 올랐다. 그들의 기념일은 로마 보편 전례력의 9월 26일에 추가되었으나 1969년 전례력 개정 이후부터 성 이사악 조그가 순교한 다음 날인 10월 19일(10월 18일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과 중복을 피하고자)로 변경해 기념하고 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10월 19일 목록에서 성 요한 드 라랑드가 이날 뉴캐나다의 오세르네논 마을에서 현지 이교도들에 의해 살해되었음을 전해주었다. 그리고 성 요한 드 브레뵈프와 성 이사악 조그와 동료 순교자들의 선교활동과 순교 사실에 관해 전하며 이날 1642년부터 1649년 사이에 캐나다에서 순교한 여덟 명의 예수회원 모두를 함께 기념한다고 기록하였다. 이들 여덟 명의 캐나다 순교자 중에서 모호크족에 의해 오세르네논에서 순교한 성 르네 구필과 성 이사악 조그와 성 요한 드 라랑드는 북미의 첫 순교자들(protomartyrs for North America)로 불리기도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