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요한네스 로이드(Joannes Lloyd, 또는 요한 로이드)는 영국 웨일스 중동부 포이스(Powys)에서 태어나 교구 사제가 되었다. 그는 오늘날 벨기에의 헨트(Ghent)에서 교육을 받고 1649년부터는 에스파냐 바야돌리드(Valladolid)에 있는 성 알바노(Albanus) 왕립대학의 영국 대학에서 수학했다. 그는 1649년 선교사 서원을 하고 영국 선교를 위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오랫동안 웨일스 지방에서 비밀리에 가톨릭 신자들을 돌보며 선교 사제로 활동하던 그는 1678년 11월 티투스 오츠(Titus Oates)의 ‘가톨릭 음모 사건’으로 혼란한 와중에 글러모건셔(Glamorganshire)의 펠린(Penllyn)에서 체포되었다. 1678년 영국 국교회 사제이자 배교자인 오츠는 가톨릭교회가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왕을 암살하고 가톨릭 신자인 왕을 세울 음모를 꾸민다고 주장하여 런던을 공포정치에 빠뜨렸었다. 카디프(Cardiff) 성 감옥에 갇혀있던 성 요한 로이드는 12월 말에 감옥에서 같은 혐의로 12월 초에 체포되어 들어온 예수회 사제 성 필립보 에반스(Philippus Evans)를 만났다. 그들은 티투스 오츠의 음모 사건과 연루된 혐의로 체포되고 기소되었다. 1679년 5월까지 재판이 연기되었지만 사건 자체가 조작된 것이었기 때문에 몇 달에 걸친 혹독한 조사와 고문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서 어떠한 혐의점도 발견할 수 없었다. 결국 성 요한 로이드와 성 필립보 에반스 신부는 잉글랜드와 웨일스에서 가톨릭 사제로서 법이 금지하는 미사와 성사를 집전했다는 이유로 반역죄를 선고받았다. 그리고 7월 22일 오전에 두 사제는 카디프(Cardiff) 근처 처형장으로 끌려가 교수형과 극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성 요한 로이드와 성 필립보 에반스 신부는 1929년 12월 1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70년 10월 25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40위 순교자’(The Forty Martyrs of England and Wales)에 포함되어 성인품에 올랐다. 그들의 축일은 순교한 날이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Maria Magdalena)의 축일과 겹치는 관계로 7월 23일로 옮겨 기념했다가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 교황에 의해 그날 기념하는 스웨덴의 성녀 비르지타(Birgitta)가 ‘유럽의 6위 수호성인’ 중 한 명으로 선포되면서 두 신부에게 봉헌된 성당 등에서만 7월 23일에 축일을 기념하였다. 1970년 시성식 이후부터 두 사제는 40위 순교자의 일원으로서 시성일인 10월 25일에 기념해 왔었다. 2000년 잉글랜드와 웨일스 교회의 새 전례력이 교황청에서 승인된 이후 40위 순교자들의 축일은 5월 4일로 옮겨져 종교개혁 시대에 순교한 모든 복자 · 성인들과 함께 ‘영국의 순교자’(The English Martyrs)라는 이름으로 전례 안에서 기념하고 있다. 이날은 종교개혁 시대 영국에서 순교한 영국 성공회의 순교자와 성인들의 기념일과 같은 날이다. 한편 웨일스 지방에서는 5월 4일 외에도 기존의 10월 25일을 ‘웨일스의 6위 순교성인’을 기념하는 별도의 축일로 유지하고 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그들이 순교한 날인 7월 22일 목록에서 영국 웨일스의 카디프에서 예수회 신부인 성 요한 로이드와 성 필립보 에반스가 가톨릭의 사제직을 수행했다는 이유로 찰스 2세 치하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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