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요한네스 에우데스(Joannes Eudes, 또는 요한 외드)는 1601년 프랑스 북서부 노르망디(Normandie) 지방 아르장탕(Argentan) 근교의 리(Ri)라는 마을에서 외과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유복한 가정에서 성장한 그는 14살 되던 해에 캉(Caen)에 있는 예수회 학교에 들어가 공부했고, 청년이 되어서는 결혼하기를 바라는 양친의 소망을 뿌리치고 1623년 오라토리오회에 입회하였다. 당시 프랑스의 상황은 개신교와의 오랜 갈등을 겪은 후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년)의 결정을 받아들이면서 가톨릭교회의 개혁과 함께 성직자의 교육과 자선 사업을 위한 새로운 수도회 설립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특히 교육과 관련해서는 1611년에 피에르 드 베륄(Pierre de Berulle) 신부가 성 필립보 네리(Philippus Neri, 5월 26일)가 이탈리아에서 설립한 것과 비슷한 오라토리오회를 설립하였다. 이 회는 성직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를 설립하고 처음으로 라틴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다양한 학문을 가르쳤다. 성 요한 외드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오라토리오회에 입회하였다. 성 요한 외드는 파리(Paris)와 그 북부의 소도시인 오베르빌리에(Aubervilliers)에서 수학한 후 1625년 12월 20일 사제품을 받고 노르망디 지역에서 본당 사목에 전념하였다. 1625년과 1631년에 노르망디 지역을 급습한 전염병의 희생자를 돌보기 위해 활약하기도 했던 그는 이 시기에 설교가로서도 큰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그는 설교와 교리교육 그리고 고해성사를 통해 다양한 계층의 신자들과 교류하였다. 그는 또한 얀센주의(Jansenism)의 강력한 반대자였을 뿐 아니라 교회와 성직자들의 타락에 대해서도 거침없는 비판을 가했다. 오라토리오회의 일원으로서 사목활동에 헌신하던 성 요한 외드는 성직자 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깊이 성찰하게 되었다. 성직자에 대한 교육이 충분하지 못하면 본당 사목 활동의 성공은 그저 일시적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점차 성직자 교육을 등한시하는 오라토리오회의 활동에 대해 실망과 반감을 갖게 되었다. 그는 또한 비참한 생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윤락 여성들을 구제하기 위한 사목에도 관심을 가져 1641년 평신도였던 장 드 베르니에르(Jean de Bernieres)와 가스통 드 렌티(Gaston de Renty)와 함께 성체회와 성모 방문 수녀회의 도움을 받아 캉에 ‘회개한 죄인들을 위한 보호소’를 개설하고 이를 이끌어갈 ‘애덕의 성모 수녀회’를 설립하였다.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성 요한 외드는 교회 안팎으로 극심한 비난과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면서 오라토리오회의 총장과의 불화가 심해지자 1643년에 오라토리오회를 탈회하고 캉에서 새로운 사제회를 설립하였다. 그가 설립한 ‘사제 양성을 위한 예수와 마리아회’는 재속 사제회로서 교구 신학교에서의 성직자 양성과 본당 사목에서의 설교와 선교 활동을 돕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하였다. 하지만 오라토리오회 총장과의 불화와 얀센주의자들의 반대에 부딪혀 그가 만든 새로운 사제회는 교황청의 인가를 받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1650년 쿠탕스(Coutance)의 주교가 자기 교구 내에 신학교를 설립해 달라고 요청하면서 새로운 사제회는 활기를 되찾았다. 그가 만든 ‘사제 양성을 위한 예수와 마리아회’는 그 후 활발한 교육 활동을 전개했고, 프랑스 혁명의 와중에 해산되기도 했으나 1826년에 재조직되고, 1851년 교황청으로부터 인가를 받은 후에는 ‘예수 마리아 수도회’로 공식 명칭을 정했다. 일반적으로는 ‘에우데스회’(the Eudists)로 불렸다. 그리고 1651년 2월 8일 교구 주교로부터 이전에 캉에 개설한 회개한 죄인들을 위한 보호소를 새로 구성해 수녀회로 승인을 받았고, 1666년에 공식적인 수녀회로서 교황의 인가를 받았다. 이 수녀회는 후대에 ‘착한 목자 수녀회’라는 국제연합수녀회로 거듭났다. 이 수녀회는 주로 ‘윤락 여성들’을 위한 구제 활동을 전개하였다. 성 요한 외드는 사제회와 수녀회를 운영하는 데 전념하면서, 1653년에 리지외(Lisieux) · 1659년에 루앙(Rouen) · 1666년에 에브뢰(Evreux) · 1670년에는 렌(Rennes) 등에 신학교를 세웠다. 오늘날 성 요한 외드가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예수 성심의 환시를 체험하고 그 신심을 전파한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Margarita Maria Alacoque, 10월 16일)처럼 예수 성심 신심을 전파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사람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는 1648년부터 수도회에서 예수 성심을 공경하는 날을 지내도록 했고, 신심 서적을 저술 · 출판했으며, 1672년 10월 20일 렌의 주교로부터 허락을 받고 예수 성심을 공경하는 축일 미사를 공식적으로 거행하였다. 성 요한 외드는 예수 성심 공경과 신심이 널리 전파되고 그 축일이 제정되도록 하는데 선구적 역할을 했고, 성모 성심 공경의 보편화에도 큰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1680년 8월 19일 캉에서 선종해 신학교 성당에 묻혔다. 성 요한 외드는 1909년에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복자품에 올랐고, 1925년 5월 31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성되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도 8월 19일 목록에서 사제 양성을 위한 수도회와 참회하는 여성들을 위한 수녀회를 설립하고 예수 성심과 성모 성심 신심에 헌신한 그의 공을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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