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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요한네스(Joannes, 또는 요한)는 1390년 6월 23일 오늘날의 폴란드 남서부 슐레지엔(Schlesien, 라틴어로는 실레시아[Silesia]) 지방 크라쿠프(Krakow) 교구의 켄티(Kety, [독] Kenty)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보통 그가 태어난 고향의 라틴어 이름을 붙여서 성 요한네스 칸티우스(Joannes Cantius/Jan Kanty, 또는 요한 칸시오)라고 불린다. 그는 경제적으로 비교적 넉넉한 형편인 아버지 스타니스와프(Stanislaw)와 어머니 안나 칸티(Anna Kanty) 사이에서 태어나 고향에서 초등 교육을 받고, 1413년에 크라쿠프(Krakow) 대학교에 입학해 공부할 수 있었다. 친절하고 겸손한 성품으로 교수와 동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그는 1417년에 문학 석사학위를 받고 이듬해에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그는 사제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하면서 크라쿠프 대학에서 철학 강의를 시작했다. 1418년에서 1421년 사이에 사제품을 받은 그는 1421년 미에호프(Miechowie)에 있는 성묘 기사단 수도원 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교장직을 제안받았다는 사실은 그의 뛰어난 지성과 재능이 인정받았음을 뜻한다. 그는 그곳에서 8년간 수련자들을 가르치면서 성 아우구스티노(Augustinus, 8월 28일)의 영성에 대한 확고한 기초를 쌓았다. 1429년에 크라쿠프 대학교의 철학 교수 자리가 공석이 되었을 때 성 요한 칸시오가 그 직책을 맡게 되었다. 그는 크라쿠프 대학에서 강의하며 평생을 보냈다. 그는 철학부 학장으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신학 공부를 계속해 박사학위를 받고 스승이 사망한 후 신학부 학장을 맡았다. 1443년경 그는 튀르키예에서 순교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예루살렘을 순례했으며, 네 차례에 걸쳐 로마(Roma)를 걸어서 순례하기도 했다. 그는 강의뿐만 아니라 설교로도 매우 유명했는데, 높아지는 명성만큼 시기와 질투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래서 한동안 대학에서 맡은 직책을 사임하고 올쿠시(Olkusz)의 성 플로리아노 성당 본당신부로 사목 활동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자신의 소명이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학문을 연구하는 것이었기에 그는 다시 크라쿠프 대학교로 돌아왔고, 성서학 교수 임명을 받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성경을 강의하며 방대한 강의록과 논문 등을 남겼다. 그는 명민한 지성과 독창적인 교수법 외에 깊은 신앙과 성덕으로도 높은 명성을 얻었다. 그는 학생들에게 정통 교리에 충실해야 하며 모든 그릇된 사상과 맞서 싸워야 하지만 논쟁에서 자제력을 갖고 신중하고 겸손하게 행동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또한 엄격한 금욕 생활을 하며 가난한 사람들과 학생들에 대한 자선과 사랑으로도 유명했다. 그는 언제나 생계를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것만 사용하고 나머지 자신이 받는 모든 것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정기적으로 나누어주었다. 그는 사막 교부들의 금욕적인 삶을 본받아 바닥에서 잠을 자고 고기를 먹지 않는 등 음식도 극히 절제하였다. 또한 그는 많은 기적을 행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후대에 기록된 대중적 전기들은 사실과 전설을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그의 성덕과 기적에 관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그는 1473년 12월 24일 모교에서 은퇴 생활을 하던 중 83세의 나이로 선종하였다. 그의 유해는 크라쿠프의 성녀 안나 대학 교회에 안치되었고, 그의 무덤은 인기 있는 순례지가 되었다. 성 요한 칸시오는 1676년 3월 28일 교황 클레멘스 10세(Clemens X)에 의해 시복되었고, 1767년 7월 16일 교황 클레멘스 13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에 앞서 1737년에 교황 클레멘스 12세는 그를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그는 또한 크라쿠프 대학교(오늘날의 야기엘론스키/야기에우워[Jagiellonski/Jagiellonian] 대학교)의 수호성인으로도 공경을 받고 있다. 켄티의 성 요한 또는 성 요한 칸시오는 성인품에 오른 후 1770년 로마 보편 전례력에 추가되어 매년 10월 20일에 축일을 기념하였다. 그래서 옛 “로마 순교록”은 10월 20일 목록에서 폴란드에서 사제요 증거자인 성 요한 칸시오가 활동했는데, 그는 덕행과 기적으로 빛났고 교황 클레멘스 13세에 의해 성인 반열에 올랐다고 전해주었다. 1969년 전례력 개정 이후에는 그가 선종한 날이 주님 성탄 대축일 전날인 관계로 하루 앞당겨 12월 23일에 축일을 기념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12월 23일 목록에서 켄티의 성 요한은 사제품을 받은 후 크라쿠프 대학교에서 오랫동안 가르쳤고, 나중에 올쿠시 본당의 사목을 맡게 되어 자신의 덕행에 올바른 신앙의 증거를 더했으며, 협력자들과 제자들에게 타인을 향한 경건함과 사랑의 본보기가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 날인 12월 24일 폴란드의 크라쿠프에서 천상의 기쁨을 안고 세상을 떠났다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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