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Joannes Chrisostomus, 또는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시리아의 안티오키아(Antiochia, 오늘날 튀르키예의 안타키아[Antakya])에서 아버지 세쿤두스(Secundus)와 어머니 안투사(Antusa)의 아들로 태어났다. 출생 연도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344~354년 사이로 추정하고 있다. 아버지 세쿤두스는 어머니 안투사가 20살 되던 해에 사망했기에 성 요한은 젊은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했다. 그는 다른 젊은이들처럼 세속적인 출세를 위해 수사학을 배우고 향락을 즐겼으나 점점 그런 생활에 회의와 염증을 느껴 친구이자 나중에 타르수스(Tarsus)의 주교가 된 디오도루스(Diodurus)와 함께 성경 연구와 수덕 생활에 관심을 쏟게 되었다. 371년 안티오키아의 성 멜레시오(Meletius, 2월 12일) 주교는 그에게 독서직을 주고 자기 곁에서 일하도록 했다. 하지만 평소에 수도 생활을 갈망하던 그는 인근 광야로 가서 노(老) 은수자의 지도를 받으며 4년간 생활했다. 그리고 더 적극적인 수덕 생활을 열망해 동굴에 들어가 2년간 고행과 성경 독서에 전념하였다. 지나친 고행으로 인해 건강을 크게 해친 성 요한은 어머니 안투사의 눈물 어린 간청 때문에 안티오키아로 돌아왔다. 성 요한은 381년 성 멜레시오 주교에게 부제품을 받고, 386년에는 플라비아누스(Flavianus)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았다. 그 후 12년간 안티오키아에서 설교 사제로 활약하면서 수많은 명강론을 했다. 그의 강론이 너무 유명해서 ‘크리소스토무스’(Chrisostomus), 즉 황금처럼 귀한 말씀을 한다는 의미에서 ‘금구(金口)’라는 별명을 얻었고, 390년부터는 신약성경에 관한 연속 강론을 시행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397년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인 넥타리우스(Nectarius)가 사망하자 동로마 제국의 황제는 성 요한을 후임 총대주교로 임명하려고 했다. 그는 이를 거절했으나 황제의 뜻이 워낙 완강해 어쩔 수 없이 수락하였다. 그래서 398년 2월 26일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인 테오필루스(Theophilus)에게 주교품을 받았다. 수도(首都)의 총대주교가 된 그는 궁중 생활과 너무나 밀착되어 부패한 성직자와 수도자들의 화려한 생활을 질타하고, 신자들도 자기 생활을 윤리적으로 쇄신하도록 강조하였다. 그뿐 아니라 가난한 이들을 위한 여러 가지 구호사업을 시작함으로써 교회의 개혁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에페수스(Ephesus)에서 주교회의를 개최하여 성직매매를 한 6명의 주교를 면직시켰다. 그러자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총대주교의 개혁에 불만을 품고 있던 적대자들이 연대하여 그를 반대하기 시작했다. 그의 가장 극렬한 반대자는 그에게 주교품을 준 알렉산드리아의 테오필루스 총대주교였다. 그리고 황실과의 관계도 처음에는 좋았으나 황후 에우독시아(Eudoxia)가 실권을 잡은 후 그녀의 지나친 사치와 탐욕을 비판하면서 점점 나빠졌다. 성 요한은 403년 콘스탄티노플 근처 퀘르치아(Quercia)에서 개최된 주교회의에서 적대자들의 근거 없는 모략으로 고발되어 면직되었고, 소심증이 있던 아르카디우스(Arcadius) 황제(395~408년 재위)는 이 결정을 받아들여 그를 비티니아(Bithynia, 고대 소아시아 북서부 지역)로 유배를 보냈다. 그러나 신자들이 이 결정에 반발해 폭동을 일으키자 이에 놀란 에우독시아 황후는 그의 유배를 취소하였다. 이렇게 그의 첫 번째 유배는 오래가지 않았고 성 요한은 군중의 환호를 받으며 귀환하였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2달 후 황후는 대성당 옆에 은으로 만든 자기 조각상을 세우고 성대한 축제를 열었다. 이에 격분한 성 요한 주교는 성 요한 세례자 수난 축일에 강론을 통해 비판했고, 황후를 헤로디아에 비유한 것을 깨달은 적대자들은 그의 착좌식에 교회법적 하자가 있다며 다시금 면직을 요구했다. 황제는 그에게 주교 직무 정지를 명했지만 성 요한은 이를 거부하였다. 결국 404년 주님 부활 대축일 밤에 예비 신자들에게 세례성사를 베풀고 있을 때 무장 군인들이 들어와 난동을 부리고 세례소를 피로 물들였다. 그리고 그해 6월 9일 황제는 성 요한 총대주교를 다시금 쿠쿠수스(Cucusus, 오늘날 튀르키예 중남부의 곡순[Goksun])로 유배를 보냈다. 이 소식이 지리적으로 가까운 안티오키아 교회에 전해지자 그를 만나보려는 신자들의 순례 행렬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러자 황제는 사람들이 그를 찾을 수 없도록 흑해 동편의 피티우스(Pityus, 오늘날 조지아의 흑해와 면한 휴양도시인 피춘다[Pitsunda])라는 험한 숲속으로 유배지를 옮기라는 명령을 내렸다. 성 요한은 새로운 유배지로 가던 중 407년 9월 14일 코마나(Comana, 오늘날 흑해와 가까운 튀르키예 중북부 토카트[Tokat] 지방에 있는 구메네크[Gumenek] 마을의 옛 이름)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의 유해는 438년 1월 27일 백성들이 기다리는 가운데 콘스탄티노플로 운구되었고, 에우독시아의 아들인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408~450년 재위)가 그의 유해 앞에 엎드려 자기 부모의 죄를 용서해 달라며 통곡하였다. 성 요한은 ‘금구’(크리소스토모)라는 별명에 걸맞게 수많은 뛰어난 강론과 저서를 남겼다. 그는 안티오키아 학파에 속한 학자 중에서 가장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양뿐만 아니라 그 내용이 신학 · 정치 · 사회 ·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니기에 서방 교회의 성 아우구스티노(Augustinus, 8월 28일)와 비교할 만하다. 그의 강론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고, 신자 교육을 위한 성경 연속 강론도 큰 효과를 보았다. 총 6권으로 된 그의 대표작인 “사제직”(De sacerdotio)과 수도 생활에 관한 다양한 저서와 호교론적 저서도 전해지고 있다. 교황 인노첸시오 1세(Innocentius I)는 412년에 그의 명예를 회복하며 콘스탄티노플 주교 명단에 그의 이름을 복원하였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1626년 5월 1일 이후 로마(Roma)의 성 베드로 대성전 성가대 경당에 안치되어 있다. 1568년 교황 성 비오 5세(Pius V, 4월 30일)는 그를 교회학자로 선포하면서 ‘동방의 네 명의 위대한 교회학자’ 중 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동방 교회의 4대 교부(교회학자)는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와 알렉산드리아의 성 아타나시오(Athanasius, 5월 2일), 성 대 바실리오(Basilius Magnus, 1월 2일), 나지안주스(Nazianzus)의 성 그레고리오(Gregorius, 1월 2일)이다. 1908년 교황 성 비오 10세(Pius X, 8월 21일)는 그를 모든 그리스도교 설교자들의 수호성인으로 선언하였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일찍부터 동방 정교회와 가톨릭교회에서 모두 성인으로 공경을 받았다. 옛 “로마 순교록”은 그의 유해가 438년 코마나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이장된 날, 즉 1월 27일 목록에서 그의 설교와 모범적 삶 그리고 유배 중에 삶을 마감했음을 전하며, 테오도시우스 황제 때 이날 콘스탄티노플로 유해를 이장했고 나중에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 안치했으며, 교황 성 비오 10세에 의해 모든 설교가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고 기록하였다. 또한 선종한 날인 9월 14일 목록에서는 적대자들의 모함으로 유배를 당해 군인들에게 학대를 받아 숨을 거두었고, 그의 유해가 이장된 1월 27일에 축일을 기념한다고 했다. 선종한 날인 9월 14일에 축일을 기념하지 않았던 것은 그날이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이기 때문이었다. 1969년 로마 보편 전례력 개정과 함께 그의 축일은 같은 이유로 선종 전날인 9월 13일에 기념하도록 변경되었다. 그래서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도 9월 13일 목록에서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이자 교회학자인 성 요한을 기념한다고 하며, 그가 안티오키아에서 태어나 사제품을 받고 탁월한 설교로 ‘크리소스토모’라는 칭호를 받을 자격이 있었으며, 콘스탄티노플의 주교로 선출되어 탁월한 목자요 교사임을 보여주었다고 적었다. 하지만 적대자들에 의해 유배형을 받고 경비병들에게 학대를 당해 9월 14일 오늘날 튀르키예에 속한 폰투스(Pontus)의 구메네크에서 자신의 영혼을 하느님께 바쳤다고 기록하였다. 그리고 9월 14일 목록에서는 그날이 그가 선종한 날임을 알리며 그 전날에 축일을 기념한다고 언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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