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요한네스 페인(Joannes Payne, 또는 요한 페인)은 1532년 영국 잉글랜드 중부 케임브리지셔(Cambridgeshire)의 피터버러(Peterborough)에서 열심한 프로테스탄트 부모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성장한 후 가톨릭으로 개종했고, 비교적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1574년 프랑스 두에(Douai)의 영국 대학에 들어갔다. 1576년 4월 7일 캉브레(Cambrai)의 대주교에게 사제품을 받은 후 바로 4월 24일 동료인 성 쿠트베르토 메인(Cuthbertus Mayne, 11월 30일) 신부와 함께 영국 선교를 위한 여정에 올랐다. 성 쿠트베르토 메인 신부는 콘월(Cornwall)로, 그는 에식스(Essex)로 가서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인게이트스톤(Ingatestone)에서 윌리엄 피터(William Petre) 경의 미망인인 앤 피터(Anne Petre)과 윌리엄 브라운(William Browne) 경의 딸 집에서 주로 머물렀다. 그들의 집은 가톨릭 사제를 위한 은신처(Priest Hole)로 사용되었고, 선교활동을 위해 그는 앤 피터 부인댁의 집사로 생활했다. 그는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톨릭 신자인 메리 1세(Mary I) 여왕 때 배스(Bath) 교구에서 부제품을 받은 후 프로테스탄트 신자가 된 조지 고드살프(George Godsalf)를 다시 가톨릭으로 돌아오도록 했다. 성 요한 페인은 그를 두에로 보내 사제품을 받도록 도와주었다. 그는 1577년 초 인게이트스톤에서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가 곧 풀려난 뒤 11월에 두에로 돌아갔다. 그리고 1579년 성탄절 전에 인게이트스톤으로 다시 돌아왔다. 1581년 7월 초 성 요한 페인은 1577년에 사제품을 받고 잉글랜드로 돌아온 조지 고드살프 신부와 함께 워릭셔(warwickshire)에서 앤 피터(Anne Petre) 부인의 저택에 머물던 중 밀고자의 신고로 체포되었다. 그들은 심문을 받은 후 7월 14일 런던탑으로 이송되었다. 조지 고드살프 신부는 몇 년을 감옥에서 보낸 후 풀려나 1585년 9월 외국으로 추방된 후 되었고, 1592년 파리에서 선종했다. 성 요한 페인은 여러 차례의 심문과 재판을 받은 후 1582년 3월 22일 첼름스퍼드(Chelmsford)에서 반역죄로 기소되었다. 그는 여왕과 주요 관리들을 죽이고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를 왕좌를 올리려 했다는 혐의를 받았으나 그와는 상관없는 거짓 음모였기 때문에 완강히 부인했다. 하지만 그는 그해 4월 2일 아침 첼름스퍼드의 처형 장소로 끌려가 교수형과 극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성 요한 페인 신부은 1886년 12월 29일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70년 10월 25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40위 순교자’(The Forty Martyrs of England and Wales)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그의 축일은 개인적으로는 순교한 날인 4월 2일에 기념하고, 시성 후에는 40위 순교자의 일원으로서 시성일인 10월 25일에 기념해 왔었다. 2000년에 잉글랜드와 웨일스 교회의 새 전례력이 교황청에서 승인된 이후 40위 순교자들의 축일은 5월 4일로 옮겨져 종교개혁 시대에 순교한 모든 복자 · 성인들과 함께 ‘영국의 순교자’(The English Martyrs)라는 이름으로 전례 안에서 기념하고 있다. 이날은 종교개혁 시대 영국에서 순교한 영국 성공회의 순교자와 성인들의 기념일과 같은 날이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4월 2일 목록에서 영국의 첼름스퍼드에서 성 요한 페인 신부가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통치 중에 반역죄라는 모함을 받아 교수형을 당했다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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