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의 옵발덴 칸톤 삭셀른 교외의 비옥한 평야에 위치한 플뤼얼리 태생인 성 니콜라우스 데 플뤼에(Nicolaus von Flue, 또는 니콜라오)는 도로테아 비스와 결혼하여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였고, 5남 5녀의 자녀를 두었다. 그는 1439년의 취리히 전쟁에서 주민들과 합세하여 싸웠고, 1453년의 전쟁에서는 대장으로 싸웠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공직자가 되는 것을 꺼렸다. 1467년 그의 나이 50세에 때에, 그는 아내와 자녀들의 동의를 얻어서 은수생활을 시작하였는데, 고향 근교인 란프트 움막에서 9년 동안을 지냈다. 이때부터 그는 성덕과 지혜로 명성이 드높았고, 주민들과 지도자들의 고문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는 1481년의 스위스 연방을 확립할 때 프리부르와 솔레르의 합병에도 큰 공을 세웠고, 부르고뉴(Bourgogne)의 찰스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는 데에도 한 몫을 하였다. 그는 스위스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수도자의 상을 정립하였고, ‘클라우스 수도자’로 널리 알려졌다. 그는 1487년 3월 21일 자신의 움막이 있던 란프트에서 선종하였고, 1947년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시성되었다. 그는 스위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고, 스위스와 독일에서는 그의 축일을 9월 25일에 기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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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 성인명 | 제목 | 작성자 | 작성일 | 조회수 | 추천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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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니콜라오 데 플 ...] | 플뤼에의 성 니콜라오: 스위스의 수호성인 | 주호식 | 2011/04/23 | 500 |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