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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세영 알렉시오(9.20)

우세영 알렉시오(9.20) 기본정보 [기본정보] [사진/그림] [자료실] 인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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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명 우세영 알렉시오 (禹世英 Alexis)
축일 9월 20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번역가, 순교자
활동지역 한국(Korea)
활동연도 1845-1866년
같은이름 알렉시스, 알렉시우스, 알렉씨오, 알렉씨우스, 우 알렉시오, 우알렉시오
성인 기본정보

   성 우세영 알렉시오(禹世英, Alexius)는 세필(世弼)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는데, 황해도 서흥(瑞興)의 향교골에서 대대로 선비 생활을 하던 부유한 양반집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재주가 뛰어난 그는 18세가 되던 해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 그런데 그는 우연히 알게 된 김기호 요한(金起浩, Joannes)이라는 전교회장을 통해 천주교 교리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삶의 의미와 보람을 느끼게 되어 천주교에 입교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는 아버지와 가족들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벼슬길을 외면한 채 세례를 받기 위해 집을 나섰다. 그는 몇몇 예비신자와 함께 서울로 상경해 성 베르뇌 시메온(Berneux Simeon, 張) 주교를 찾아갔다. 그와 함께 온 이들은 모두 세례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성 우세영을 만나본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는 그의 학식과 신앙과 열성은 대견스러우나 아직 나이가 어리고 가족의 반대 등 주위 환경이 너무 어려워 신앙을 지켜나갈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서 선뜻 세례를 주지 않았다.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는 그를 성 정의배 마르코(丁義培, Marcus) 회장에게 보내 눈여겨 살펴보도록 했고, 눈물을 흘리며 간청하는 그의 진심에 대한 성 정의배 회장의 증언을 듣고 다른 동료들보다 한 주 정도 늦게 알렉시오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다(1863년).

   세례를 받고 즉시 집으로 돌아온 성 우세영 알렉시오는 천주교를 반대하는 부모와 가족에게 먼저 전교를 시작했다. 하지만 가족의 반대와 천대가 극심할 뿐 아니라 수개월 동안 계속되는 저주와 악담까지 참아 받아야만 했다. 가족들은 이웃의 구설에 오르는 것이 두렵고 부끄럽다는 이유로 그를 감금하기까지 했는데, 그는 이 모든 것을 온유함과 인내로써 잘 이겨냈다. 그 후 그는 “차라리 네가 집에 없으면 죽은 것으로 여겨 위안이 될지 모른다.”라는 부친의 말을 듣고, 집을 떠나 서울에 있는 성 정의배 마르코 회장 집으로 가서 만 1년 동안 머물며 묵상과 신앙생활에 전념하였다. 이때 그는 집안 식구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는 한편 생활비를 벌기 위해 교리서 필사와 번역, 십이단 편찬 등에 전력하였다.

   그 후 고향 집으로 다시 돌아온 그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아버지도 아들이 믿는 천주교에 관심을 보이자 차근차근 천주교 진리를 설명하며 전교한 결과 가족과 친척 20여 명이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가족이 세례를 받았다는 이유로 마을 사람들의 멸시와 천대가 있었고, 정부에 고발하겠다는 등의 소동이 일어나자 더는 고향에서 자유로이 신앙생활을 할 수 없음을 깨닫고 하는 수없이 모든 가산을 버리고 평안도 논재(평안남도 대동군 율리면 답현리 소재)로 이사하여 가족과 함께 열심히 수계하며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 1866년 2월 16일 이웃 마을인 고둔리 공소회장 집에서 축일을 지내다가 성 유정률 베드로(劉正律, Petrus) 등 여러 신자와 함께 체포되어 평양 감영으로 끌려갔다. 첫 번째 심문은 잘 이겨냈지만 두 번째 심문에서 그만 혹형을 이겨내지 못하고 배교한다는 말을 하고 말았다. 석방되자마자 자신의 배교에 대해 깊이 뉘우친 그는 스승인 성 정의배 회장과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에게 사죄하고자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울로 갔다. 그러나 이미 성 정의배 회장이 체포되었음을 안 그는 회장 집을 지키던 포졸들에게 자신도 천주교 신자라고 자수하여 체포되었다. 포도청으로 끌려간 그는 과거 배교한 사실을 알고 있는 관장으로부터 여러 차례 배교를 강요당하며 심한 형벌을 받았다. 하지만 끝까지 열심한 신앙으로 이겨냈고, 옥중에 있는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에게 지난날 배교했던 일에 대한 사죄도 받았다고 한다. 그렇게 평온한 마음을 되찾은 그는 용덕(勇德)을 발휘하여 모든 고문을 잘 참아 견디었고, 혹심한 곤장과 많은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자기 신앙을 용감하게 고수하여 기다리던 사형선고를 받았다.

   성 우세영 알렉시오는 1866년 3월 11일 새남터에서 스승인 성 정의배 마르코, 푸르티에(Pourthie, 申) 신부, 프티니콜라(Petitnicolas, 朴) 신부 등과 함께 군문효수형(軍門梟首刑)을 받아 순교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22세였다. 그의 유해는 앞서 3월 7일 순교한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와 세 명의 신부들과 함께 형장에 방치되었다가 5월 12일 박순지 요한 등에 의해 발굴되어 새남터 인근에 안장되었고, 보름 뒤에 다시 와서(왜고개, 서울 용산구 한강로3가)로 옮겨 모셨다. 그 후 1899년 10월 30일 성 우세영 알렉시오를 비롯해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유해가 용산 예수성심신학교(현 용산구 원효로 4가 1)로 옮겨졌다가 이듬해 9월 5일 다시 명동 성당 지하 성당에 안치하였다. 성 우세영 알렉시오의 유해는 1968년 시복식을 계기로 다시 절두산 순교성지 내의 병인박해 100주년 기념성당 지하에 마련된 성해실로 옮겨 안치하였다.

   성 우세영 알렉시오는 1968년 10월 6일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병인박해 순교자 24위’의 한 명으로 시복되었다. 그리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기념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103위 한국 순교성인’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3월 11일 목록에서 한국의 새남터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때문에 친척들에게 멸시당하고 순교한 교리교사 성 정의배 마르코와 성 우세영 알렉시오에 대해 기록하였다. 그의 축일은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에 함께 경축하고 있다.♣

참고자료

  • 구중서 외 저, 한국천주교회가 낳은 103위 순교성인들의 생애 3 - '성 알렉시오 우세영', 서울(성황석두루가서원), 1992년, 79-90쪽.
  • 아드리앙 로네/폴 데통베 저, 안응렬 역, 한국 순교자 103위 성인전 (하), '제8장 정 마르코, 우 알렉시오', 서울(가톨릭출판사), 2017년, 227-239쪽.
  • 아드리앙 로네/폴 데통브 저, 안응렬 역, (파리외방전교회 아드리앙 로네 · 폴 데통브 신부가 기록한) 조선 순교자록 – 제29장 정 마르코, 우 알렉시오, 서울(가톨릭출판사), 2021년, 387-395쪽.
  • 최정오 편, 가톨릭 성인 사전 - 우세영 알렉시오, 서울(도서출판 작은 예수), 1998년, 1065-1066쪽.
  •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9권 - '우세영',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2002년, 6652-66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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