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마르티노 루카 위앵(Martin Luc Huin, 민 루카 또는 위앵 루카) 신부의 세례명은 마르티노 루카(Martinus Lucas)이고, 한국 성은 민(閔)이다. 그는 1836년 10월 20일 프랑스 북동부 랑그르(Langres) 교구의 기용벨(Guyonvelle)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포도밭을 경작하던 그의 부모는 늘 자기 가문에서 성직자와 수도자가 많이 배출되었다고 자랑하면서 9남매 모두 훌륭한 신앙인으로 성장하도록 교육했다. 막내로 태어나 신앙적인 환경에서 자란 성 위앵 루카는 1851년 본당신부의 추천으로 랑그르 소신학교에 입학해 부지런히 공부한 후 1856년 10월에 랑그르 대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1861년 6월 29일 사제품을 받아 랑그르 교구의 사제가 되었다. 수품 후 그는 2년 동안 멜레(Melay)와 부아제(Voisey) 본당에서 보좌신부로 활동하면서도 전교 사제의 꿈을 키우다가 1863년 8월 20일 교구장 주교의 허락을 받고 파리 외방 전교회에 입회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자신의 선교지가 조선임을 알았을 때, 그는 기뻐하며 부모님은 물론 옛 본당신부에게도 편지를 썼다고 한다. 성 위앵 루카 신부는 1864년 7월 15일에 함께 조선 선교사로 임명된 성 랑페르 드 브르트니에르 유스토(Ranfer de Bretenieres Justus) · 성 도리 헨리코(Dorie Henricus) · 성 볼리외 루도비코(Beaulieu Ludovicus) 신부와 함께 파리(Paris)를 떠나 마르세유(Marseille)에서 상선을 타고 극동으로 향해 9월 중순 무렵 홍콩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다시 상해(上海)를 거쳐 11월에 요동(遼東)의 차쿠에 도착해 한문 공부를 하며 제4대 조선 대목구장인 성 베르뇌 시메온(Berneux Simeon, 張) 주교의 연락을 기다렸다. 이윽고 1865년 4월 17일 차쿠를 출발한 성 위앵 루카 신부와 동료들은 백령도 인근에서 주교가 보낸 배로 갈아타고 5월 27일 충청도 내포(內浦) 지방에 상륙하여 마침내 조선 땅을 밟았다. 마침 내포에 와 있던 성 다블뤼 안토니오(Daveluy Antonius) 주교의 환영을 받은 성 위앵 루카 신부 일행은 주교의 지시를 받아 서울과 경기도로 떠났다. 성 위앵 루카 신부는 6월 18일까지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와 함께 내포 지방에 머물며 조선말을 공부했다. 그러고 나서 당진 합덕 지방의 세거리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초가집에 거처하며 조선의 풍습에 적응하고자 노력하고 한문과 조선말 공부에 최선을 다했다. 그 결과 성 위앵 루카 신부는 1866년 2월에 벌써 교우들의 고해성사를 듣고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칠 수가 있었다. 그는 박해 직전까지 5백여 명에게 고해성사를 주고, 15명에서 20명에게 병자성사를 주었을 뿐 아니라 몇몇 교우의 혼인성사도 집전해 주었다. 1866년 초 병인박해(丙寅迫害)가 일어나자 그는 3월 9일에 거더리(현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로 가서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와 성 오매트르 베드로(Aumaitre Petrus) 신부를 만나 하루를 보내고 세거리로 돌아왔다. 신자들의 권유로 거처를 옮기던 중 3월 11일 거더리에서 체포된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의 편지를 받고 신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다음날 주교의 뜻대로 자수하여 거더리로 끌려왔다. 성 오매트르 베드로 신부도 거더리로 와서 자수하였다. 성 위앵 루카 신부는 함께 체포된 주교와 동료 신부와 함께 홍주 관아를 거쳐 서울로 압송되어 의금부에 갇혔다. 3월 19일 포도청에서 두 차례의 신문을 받은 그는 3월 23일에 군문효수(軍門梟首)의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지인 충청남도 보령 수영(保寧水營)으로 이송되었다. 당시 국혼(國婚)이 가까운 시기라 조정에서는 서울에서 피를 흘리는 것이 나쁜 징조라 하여 멀리 떨어진 보령 수영으로 처형지를 정했다. 그래서 성 위앵 루카 신부는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 · 성 오매트르 베드로 신부 · 성 황석두 루카(黃錫斗, Lucas) · 성 장주기 요셉(張周基, Josephus)과 함께 죽음의 행진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866년 3월 30일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 처형장인 갈매못(현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영보리)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 이때 그의 나이 30세였다. 그는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내 마음에 아픈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이토록 젊은 나이에 죽는다는 것도 아니요, 이곳과 같은 처절한 장소에서 죽게 된 때문만도 아니라, 이 나라 불쌍한 백성들의 구령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죽게 되니 그것만이 마음 아플 뿐이오.” 성 위앵 루카 신부를 포함해 갈매못에서 순교한 5위의 순교자 중에서 성 황석두 루카의 시신은 가족들이 거두어 홍산 삽티(현 충청남도 부여군 홍산면 상천리)를 거쳐 고향인 연풍 병방골(충청북도 괴산군 장연면 방곡리)에 이장했고, 1982년 연풍 순교성지로 천묘(遷墓)하였다. 나머지 4위 순교자들의 시신은 사흘 뒤에 신자들에 의해 거두어져 형장 부근에 묻혔다가 6월 초 몇몇 신자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모셔와 서짓골(충남 보령시 미산면 평라리)에 매장하였다. 그 후 1882년 3월 제7대 조선 교구장인 블랑(Blanc, 白) 주교의 지시로 발굴되어 일본 나가사키(長崎) 대교구의 오우라 성당으로 옮겨졌다가 12년 만인 1894년 5월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1900년부터 명동 성당에 안치되었다. 그리고 시복식을 앞둔 1967년 절두산 순교성지 내의 병인박해 100주년 기념성당 지하에 마련된 성인 유해실에 안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 위앵 루카 신부는 1968년 10월 6일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병인박해 순교자 24위’의 한 명으로 시복되었다. 그리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기념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103위 한국 순교성인’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3월 30일 목록에서 한국의 갈매못에서 성 위앵 루카 신부와 동료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때문에 참수형을 당해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그의 축일은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에 함께 경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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