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이사악 조그는 1607년 1월 10일 프랑스 중부 오를레앙(Orleans)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고향에 있는 예수회 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는 1624년 17살의 나이로 예수회에 입회하여 루앙(Rouen)에서 수련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1626년 첫 서원을 한 후 라 플레슈(La Fleche) 왕립 대학에서 철학을 배웠고 1633년 신학 공부를 위해 파리(Paris)의 클레르몽(Clermont) 대학으로 보내졌다. 이어서 1636년 1월 클레르몽에서 사제품을 받고 2월 10일 첫 미사를 봉헌했다. 일찍부터 선교사를 소망했던 성 이사악 조그는 뉴프랑스로 불리는 캐나다의 퀘벡주(Quebec州)에서 선교하는 성 요한 드 브레뵈프(Joannes de Brebeuf) 신부의 이야기를 듣고 퀘벡의 휴런족(Hurons) 인디언 선교사로 자원했다. 그해 4월 8일 그는 성 가롤로 가르니에(Carolus Garnier) 신부를 포함한 5명의 예수회원과 함께 캐나다로 파견되었다. 6월 11일 퀘벡에 도착한 성 이사악 조그는 몇 달 뒤에 성 요한 드 브레뵈프 신부와 합류하기 위해 카누를 타고 먼 길을 떠났다. 9월 11일 휴런호(Lake Huron)의 아이호나티리아(Ihonatiria)에 있는 생조세프(Saint-Joseph) 정착 마을에 도착해 예수회 선교부 대표인 성 요한 드 브레뵈프 신부를 만났다. 그런데 도착하자마자 성 이사악 조그 신부는 열병에 걸리고 말았다. 그리고 1637년 퀘벡주에 천연두가 만연하면서 수천 명의 인디언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휴런족을 비롯한 인디언들은 유럽인에게서 전염된 천연두로 인해 엄청난 희생을 경험했고, 그 와중에 선교사들은 대재앙을 몰고 온 악마로 간주되어 인디언 주술사들로부터 큰 곤욕을 치르고 생명의 위협까지 받았다. 성 요한 드 브레뵈프는 휴런족의 거의 절반이 천연두로 사망하는 위급한 상황에서도 그들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성 이사악 조그 신부도 6년 동안 생조세프 마을에 살면서 휴런족의 말과 생활 방식을 배우고 인디언들의 관습을 존중하며 삶을 공유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인디언 추장들의 모임에서 ‘검은 옷’을 입은 예수회원들을 죽여야 재난이 끝날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면서 순교의 위험이 점점 커졌다. 성 요한 드 브레뵈프는 생트마리(Sainte-Marie)라는 마을로 선교 본부를 옮겼고, 인근 인디언 마을 사람들에게 농사와 축산 방법 등을 전수했다. 생트마리 마을의 번영을 목격한 치페와족(Chippewas) 인디언들이 ‘검은 옷’의 선교사들을 요청하자 성 이사악 조그 신부는 1641년 9월 그들을 방문해 그들 또한 평화롭게 하느님을 섬기려 한다는 뜻을 선교부에 전했다. 치페와족은 슈피리어호(Lake Superior)에 사는 북미 최대의 원주민들이었다. 하지만 당시 예수회의 선교사가 부족해 그곳까지 가지는 못하고 휴런족의 복음화에 집중해야 했다. 1642년 휴런족이 기근과 질병에 시달릴 때 성 이사악 조그 신부는 동료들과 함께 보급품을 구하러 떠났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성 이사악 조그 신부와 성 르네 구필(Rene Goupil) 수사가 이로쿼이족(Iroquois)의 일파인 모호크족(Mohawks)에게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한 후 성 르네 구필 수사가 먼저 도끼에 맞아 9월 29일 순교하였다. 성 이사악 조그 신부는 1년 이상 감옥에 갇혀 손가락이 잘리는 등 잔인한 고문을 받고 노예로 살다가 다행히 어느 네덜란드 상인의 도움으로 기적적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오늘날 미국의 뉴욕시(New York City)에 해당하는 뉴암스테르담(New Amsterdam)에서 프랑스 예수회원들과 감격스러운 재회를 가졌다. 그리고 영국을 거쳐 프랑스로 돌아온 그는 렌(Rennes)의 예수회 거주지에 잠시 머물렀다가 1644년 4월 고향 오를레앙에서 어머니는 만났다. 순교의 열정에 불탔던 그는 6월에 다시 캐나다로 돌아와 몬트리올(Montreal)에서 먼저 활동하며 휴런족에게 돌아갈 길을 찾았다. 퀘벡으로 돌아온 그는 1646년 9월 24일 예수회의 평신도 보조자인 성 요한 드 라랑드(Joannes de Lalande)와 함께 모호크족이 속한 이로쿼이족과 프랑스 사이의 평화 조약을 확고히 하기 위해 프랑스 대사 자격으로 대표단을 이끌고 이로쿼이족 영토로 들어갔다. 어렵게 목적지인 오세르네논(Ossernenon, 오늘날 미국 뉴욕주의 오리스빌[Auriesville])에 10월 17일에 도착했다. 하지만 여전히 일부 모호크족은 수많은 인디언을 희생시킨 천연두 전염병의 원인이 ‘검은 옷’을 입은 예수회 선교사들 때문이라고 비난했고, 그 분노의 화살을 막 도착한 성 이사악 조그와 성 요한 드 라랑드에게 돌렸다. 결국 성 이사악 조그 신부는 또다시 모호크족에게 붙잡혀 칼로 난자당한 후 마지막으로 토마호크 도끼로 머리를 쳐 죽이는 잔인한 형벌을 받고 도착 다음 날인 10월 18일 순교하였다. 그리고 다음 날 성 이사악 조그의 시신을 수습하려던 성 요한 드 라랑드마저 도끼에 맞아 순교하였다. 모호크족은 이들 순교자의 시신을 모호크강(Mohawk R.)에 버리고 그들의 머리는 마을 방어벽에 매달았다. 성 이사악 조그 신부는 유럽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슈피리어호 동쪽 입구까지 개척했던 선교사였다. 성 요한 드 브레뵈프와 성 이사악 조그 사제와 6명의 동료 순교자들은 1925년 6월 21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30년 6월 29일 로마에서 같은 교황에 의해 ‘캐나다의 순교자’(수호성인) 또는 ‘북미의 첫 순교자들’로서 성인품에 올랐다. 그들의 기념일은 로마 보편 전례력의 9월 26일에 추가되었으나 1969년 전례력 개정 이후부터 성 이사악 조그가 순교한 다음 날인 10월 19일(10월 18일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과 중복을 피하고자)로 변경해 기념하고 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10월 18일 목록에서 성 이사악 조그 신부가 캐나다의 오세르네논에서 순교했는데, 그는 이전에 이교도의 노예가 되어 손가락이 잘리는 고문을 당했고, 나중에 도끼에 머리를 맞아 순교했다고 전하며 다음 날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기념한다고 기록하였다. 성 이사악 조그는 성 이사쿠스 조그(Isaacus Jogues, 또는 이사코 조그)로도 불린다. 한편 여덟 명의 캐나다 순교자 중에서 모호크족에 의해 오세르네논에서 순교한 성 르네 구필과 성 이사악 조그와 성 요한 드 라랑드는 북미의 첫 순교자들(protomartyrs for North America)로 불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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