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정의배 마르코(Marcus)는 서울 창동의 어느 양반집 태생으로 어려서부터 천성이 어질고 진실하며 행동이 신중하였다. 그러나 그의 집은 유학을 숭상하였기에 오로지 사서오경을 외우며 과거공부에만 전념하였다. 과거 공부를 마친 후 서울의 어느 서당에서 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치며 살다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자식도 없이 홀로 생활하였다. 1839년에 그는 우연한 기회에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와 모방(Manbant, 羅), 샤스탕(Chastan, 鄭) 신부가 순교하는 모습을 새남터에서 보게 되었다. 이역만리 낯선 땅에 와서 목숨을 초개같이 여기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진리를 전하며 모욕과 멸시와 학대를 달게 받고 있으니 그들은 무엇을 믿으며, 무엇을 바라고, 누구를 사랑하는 것인가? 자기들을 죽이려고 날뛰며 악의에 찬 조소를 퍼붓는데 오히려 웃는 낯으로 불쌍히 여기지 않는가? 이처럼 그의 의문은 끝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천주교 서적을 구해 읽기 시작하였고, 자기가 닦아온 지식을 바탕으로 하여 그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이제껏 나는 천주교 신자가 되면 착한 일을 할 수 없는 자로 보았었지만, 이제 알고 보니 진정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이 되려면 먼저 천주교 신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는 영세 입교하여 조선 교회의 훌륭한 일꾼이 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46세였다. 1845년에 입국한 페레올(Ferreol, 高) 주교는 그를 전교회장으로 임명하였는데, 죽는 날까지 모든 열성과 신심을 다해 임무를 수행했기에 ‘산 성인’이라 할 정도로 신자들을 잘 이끌고, 예비자들을 잘 준비시키며, 병자들을 방문하고, 먹을 것조차 없어 고생하면서도 버려진 고아들을 데려다가 도와주기도 하였다. 그의 생활은 매우 검소하였는데 그에게 값진 옷이라곤 한 벌도 없었고, 군데군데 깁고 또 기운 헌 옷을 입었고, 조금 들다가 그만 밥상을 물리곤 하였다. 그는 브르트니에르(Bretenieres, 白) 신부를 자기 집에 모셔 들여 조선말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는 자주 “순교한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로다. 반면 자기 집에 앉아 안일하게 죽는 것은 진정 두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라고 하였다. 1866년 2월 25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처음에는 감옥에 갇혔으나 의금부로 넘겨졌고, 3월 5일에는 사형선고가 내려졌고, 같은 달 11일에 처형되었다. 사형 길에 나선 정 회장은 눈을 내리 뜨고 열심히 기도하는 모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이윽고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때가 1866년 3월 11일로 바로 그의 72회 생일날이었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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