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다미안 드 베스테르는 1840년 1월 3일 벨기에의 루뱅(Louvain) 근처 트레멜로(Tremelo)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성실하고 신앙심 깊은 아버지 프란스 드 베스테르와 어머니 안나 카타리나의 7남매 중 막내이자 넷째 아들로서 요제프 드 베스테르(Jozef de Veuster)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는 부모의 뜻대로 농사를 지을 생각이었으나 수녀원에 들어간 두 명의 누나와 수도원에 들어가 사제가 된 큰형의 영향을 받아 수도원에 들어가기를 희망했다. 어린 시절부터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깊었던 그는 기도와 고행을 실천하면서 성장하였다. 그는 상업 분야의 직업을 갖기를 원하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고향에서 초등 교육과정을 마치고 왈롱(Wallonne) 지방 브렌르콩트(Braine-le-Comte)의 대학으로 진학해 수학했다. 그러나 일찍이 성소에 눈을 뜬 그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복음적 권고를 통해 완덕의 길을 걸을 결심을 했다. 그래서 그는 1859년에 큰형이 있는 ‘예수와 마리아의 성심 수도회’(The Fathers of the Sacred Hearts of Jesus and Mary, 일명 Picpus 수도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루뱅의 수도원에서 수련기를 보내고 수도명으로 4세기 초 소아시아 남동부에 있는 실리시아(Cilicia) 지방에서 의사로 활동하다 순교한 성 다미아누스(Damianus, 또는 다미아노, 9월 26일)를 선택했다. 그리고 1860년 10월 7일 수도 서원을 했다. 해외선교를 주요 목적으로 삼고 있던 예수와 마리아의 성심 수도회는 1825년 이래로 수차례에 걸쳐 샌드위치제도(The Sandwich islands)라는 별칭으로 불리던 하와이제도(The Hawaiian Islands)로 선교사들을 파견하고 있었다. 1863년 하와이 선교사로 선발된 큰형 팜필레(Pamphile) 신부가 병자들을 돌보다 장티푸스에 걸리자 신학 공부 중이던 성 다미안은 형을 대신해서 하와이 선교를 자원하였다. 이듬해 3월 19일 하와이의 호놀룰루(Honolulu) 항구에 도착한 성 다미안은 인근에 있는 아피마뉴 대신학교에서 약 2개월간 공부하고, 1864년 5월 21일 호놀룰루 대성당에서 두 명의 신학생과 함께 루이 메그레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가장 먼저 하와이섬의 퓨나(Puna) 지역으로 파견되어 원주민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1865년에 성 다미안 신부는 같은 섬의 코할라(Kohala)와 하마쿠아(Hamakua) 지역으로 옮겨 원주민들의 인습과 싸우면서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성당을 짓고 세례를 주며 용암으로 뒤덮인 섬을 돌아다니면서 미사를 봉헌하였다. 그는 그 지역의 유일한 사제였다. 성 다미안 신부가 사목 활동을 시작한 1865년 무렵 하와이제도(諸島)의 상황은 몹시 심각했다. 서구 질병에 대한 항체가 없었던 원주민들은 80여 년 만에 인구가 50만 명에서 5만 명으로 줄어들 만큼 희생되었고, 인구의 10~15%가 한센병에 걸릴 정도로 급격히 늘어나자 감염된 환자를 격리 수용하는 법이 제정되었다. 그 법에 따라 불치의 병으로 여겨지던 한센병(나병)에 걸린 환자들은 하와이제도 중앙에 있는 몰로카이섬의 북쪽 칼라우파파(Kalaupapa)라는 오지에 강제로 격리 수용되었다. 1873년 메그레 주교로부터 몰로카이섬에 수용된 나환자들이 음식조차 제대로 제공 받지 못해 영양실조로 죽어 가고 있다는 참담한 실상을 전해 들은 성 다미안 신부는 33세의 나이로 그곳의 사목을 자원했다. 1873년 5월 10일, 그는 주교와 다른 자원봉사자와 함께 몰로카이섬에 상륙했다. 그는 그동안 사제가 없어 영적인 도움을 받지 못했던 700여 명의 나환자에게 성사를 주고, 그들이 인간적으로 살 수 있도록 집뿐만 아니라 성당과 병원, 학교와 고아원 등도 직접 지어주었다. 또한 의사의 도움 없이 직접 한센병 환자들의 고름을 짜주며 환부를 씻어 주고 붕대를 갈아주면서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서서히 그리스도의 빛을 밝혀 주었다. 그리고 매일 죽어 가는 이들을 위해 관을 만들고 무덤을 마련해 정중하게 장례를 지내 주었다. 이렇게 어려움 속에서도 나환자들을 위해 헌신적인 활동을 전개하자 무관심과 자포자기에 빠졌던 환자들도 점점 그에 대한 신뢰와 존경심을 갖고 따르기 시작했다. 그는 한센병에 대한 유럽인과 미국인들의 편견을 깨기 위해 노력하며 그들을 위한 자선기금을 마련하는 데도 힘썼다. 그는 1881년에는 하와이 정부로부터 나환자들을 위해 헌신한 공로로 칼라카우아(Kalakaua) 왕실 훈장을 받았다. 성 다미안 드 베스테르 신부는 1885년경 자신도 나병균에 감염된 것을 알았으나 용기를 잃지 않고 나환자들을 위해 계속 사목했다. 강론 중에 그는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에게 다가가게 하려고 나도 나환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강론할 때 나는, 교우라는 말 대신 ‘우리 나환자’라고 말합니다.”라고 했다. 그는 요양하라는 주위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환자들을 돌보다가 1889년 4월 15일 성주간 월요일 오전 8시에 선종하였다. 그의 유해는 칼라와오(Kalawao)에 있는 성녀 필로메나(Philomena) 성당 옆, 몰로카이섬에 도착해 첫날 밤을 지새웠던 나무 아래에 묻혔다. 그 후 성 다미안 신부의 유해는 1936년 1월 벨기에 왕과 정부의 요청으로 몰로카이섬에서 벨기에로 옮겨 그의 고향과 가까운 루뱅의 성 안토니오 경당 지하 묘지에 안치하였다. 성 다미안 신부는 1992년 7월 시복 대상자로 확정되었고, 1995년 6월 4일 벨기에 브뤼셀(Brussel)의 쿠켈베르크 대성당(Koekelberg Basilica)으로도 불리는 예수 성심 대성당 광장에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시복식이 끝난 후 성 다미안 신부의 유해 일부를 몰로카이섬으로 다시 옮겨 모셨다. 그리고 2009년 10월 11일 교황 베네딕토 16세(Benedictus XVI)가 로마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그를 성인의 반열에 올렸다. 가톨릭교회에서 그의 축일은 교회의 관례대로 선종한 날인 4월 15일에 지냈으나 그날이 종종 사순시기나 주님 부활 대축일과 겹치는 관계로 미국 교회의 요청을 받아들여 성 다미안 신부가 처음 몰로카이섬에 상륙한 날인 5월 10일로 변경해 기념하고 있다. 지금도 하와이에서는 그가 선종한 날인 4월 15일에 축일을 기념한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도 4월 15일 목록에 성 다미안 드 베스테르(당시에는 복자) 신부를 추가하며 그가 예수와 마리아의 성심 수도회 신부로서 몰로카이섬에서 나병 환자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다 나병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기록하였다. 성 다미안 드 베스테르는 한센병 환자와 에이즈 환자의 수호성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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