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미니코 수도회에서 이탈리아 내의 수도회 활동을 위하여 한적한 곳을 찾았을 때 성 도미니코(Dominicus, 8월 8일)는 볼로냐를 택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가 소망하던 훌륭한 대학을 세울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적당한 곳을 물색하여 수도원을 지었으나 반대가 극심하였다. 그것은 그 땅을 소유하고 있던 안달로가(家)의 위세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안달로의 무남독녀인 디아나의 간절한 호소에 굴복하였다. 성 도미니코는 사적으로 그녀의 동정서원을 받아들였고 가능하면 수도생활을 하도록 격려하고 있었다. 얼마동안 그녀는 자기 집에 그대로 머물면서 회개 생활을 하였다. 그 후 그녀는 도미니코 수녀회의 수도원을 짓기로 집안사람들을 설득하여 좋은 반응을 얻었지만, 그녀의 부친은 완강히 거부할 뿐 아니라 그녀가 수녀회에 들어가는 것조차 금하였다. 그래서 그녀는 집을 나와서 성 아우구스티누스회에 입회하였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온 가족이 몰려와서 강제로 그녀를 집으로 데려갔다. 집에 온 그녀는 독방에 갇혀 지냈으나 또 다시 집을 탈출하여 록사나(Roxana)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이제는 어느 누구도 그녀를 방해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작센(Sachsen)의 요르단(Jordan, 2월 13일)이 안달로와 그의 아들들을 설득시켰을 뿐만 아니라, 도미니코 수도원을 짓는데 도움까지 베풀도록 그들의 마음을 누그러트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디아나는 1222년에 로마(Roma)의 성 식스투스(Sixtus) 수녀원에서 온 4명의 수녀들과 함께 볼로냐의 성녀 아녜스(Agnes) 수녀원에서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들 중에 체칠리아(Caecilia)와 아마타(Amata, 2월 20일)가 있었다. 이 두 수녀의 생활은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디아나와 마찬가지로 높은 성덕으로 유명하였다. 체칠리아는 로마의 귀족가문 출신으로 매우 뛰어난 여성이었다. 그녀는 17세 때 성 마리아(Maria) 수녀원에 들어갔다. 디아나는 1236년 1월 9일에 35세의 일기로 운명하였고, 체칠리아는 설립자 성 도미니코를 오랫동안 도왔다. 그들은 사망 후에 성녀 아녜스 수녀원에 나란히 안장되었고, 1891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함께 시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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