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카롤루스 가르니에(Carolus Garnier, 또는 가롤로 가르니에)는 1606년 5월 25일 프랑스 파리(Paris)에서 국왕 앙리 3세(Henri III)의 고문이었던 장 가르니에(Jean Garnier)와 안 드 가로(Anne de Garault)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훌륭한 교육을 받고 성장해 1624년 9월 5일 18살의 나이로 예수회에 입회해 파리 수련소에 들어갔다. 그리고 클레르몽(Clermont)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프랑스 북부 외(Eu)의 대학에서 3년 정도 교사 생활을 하다가 1635년 29살의 나이에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즉시 뉴프랑스(캐나다) 선교를 자원했으나 아버지의 극심한 반대로 인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듬해 다시 지원했고 결국은 아버지의 동의를 얻어 휴런족(Hurons) 인디언 선교부에 들어갔다. 그는 1636년 4월 8일 성 이사악 조그(Isaac Jogues) 신부를 포함한 5명의 예수회원과 함께 캐나다로 파견되었다. 1636년 6월 11일 퀘벡주(Quebec州)에 도착한 성 가롤로 가르니에는 즉시 예수회 동료인 피에르 샤스텔랭(Pierre Chastelllain) 신부와 함께 휴런족 선교지로 여행을 시작해 8월 13일 휴런호(Lake Huron)의 아이호나티리아(Ihonatiria)에 있는 생조세프(Saint-Joseph) 정착 마을에 도착해 예수회 선교부 대표를 맡고 있던 성 요한 드 브레뵈프(Joannes de Brebeuf) 신부를 만났다. 성 요한 드 브레뵈프 신부의 따뜻한 환영을 받은 성 가롤로 가르니에는 아버지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에서 “세상에서 내가 더 행복할 수 있는 곳은 없습니다.”라고 썼다. 9월 11일에 성 이사악 조그도 아이호나티리아에 도착했다. 그런데 예수회원과 그 협력자들 사이에서 천연두 전염병이 발생했다. 전염병은 곧 휴런족에게 퍼졌고 퀘벡주 전체에 천연두가 만연하면서 수천 명의 인디언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무렵 선교사들에게 세례를 받은 휴런족 대부분도 목숨을 잃었다. 그러면서 ‘검은 옷’을 입은 예수회 선교사들이 대재앙을 몰고 온 악마로 간주되어 인디언 주술사들로부터 큰 곤욕을 치르고 생명의 위협까지 받았다. 선교사들은 생명의 위험 속에서도 인디언 곁을 떠나지 않고 그들 곁에 머물며 시련을 극복해갔다. 성 가롤로 가르니에는 성 요한 데 브레뵈프 신부에게 휴런어를 배우고 그들의 문화와 관습을 익히며 2년을 보냈다. 그러고 나서 1639년과 1640년에 페툰(Petun) 인디언 또는 토바코(Tobacco) 인디언 땅에서 겨울을 보냈고, 1641년부터 1646년까지는 생조세프 선교부 등에서 활동했다. 1642년 이후 프랑스에 적대적인 이로쿼이족(Iroquois)이 휴런족 마을을 습격해 큰 피해를 주고 있었다. 1642년 9월 29일에 성 르네 구필(Rene Goupil) 수사가 순교한 후 1646년 10월 18일에 성 이사악 조그 신부, 1648년에 7월 4일 성 안토니오 다니엘(Antonius Daniel) 신부가 순교하였다. 1649년 3월 16일에 성 요한 드 브레뵈프 신부가 그리고 다음 날일 17일 성 가브리엘 랄르망(Gabriel Lalemant) 신부도 순교하였다. 성 가롤로 가르니에는 자신도 곧 순교하게 될 것임을 알고 그해 가을 자신의 협력자로 페툰 인디언 마을로 파견 온 성 노엘 샤바넬(Noel Chabanel) 신부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해 그를 선교 본부로 피신하도록 했다. 12월 5일 성 노엘 샤바넬이 선교지를 떠난 후 12월 7일 이로쿼이족이 마을을 공격해 휴런족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성 가롤로 가르니에 신부는 마을 사람들에게 도망가라 하고 남아 있는 이들에게 고해성사를 주며, 병들어 누워 있는 이들에게 세례를 주기 위해 오두막에 들어가다가 이로쿼이족이 쏜 총에 맞았다. 이로쿼이족은 그의 사제복을 벗기고 추위 속에 얼어 죽도록 내버려 두었다. 얼마 후 그가 의식을 차리자 이로쿼이족 전사가 나타나 토마호크 도끼로 그의 머리를 쳐서 죽이고 말았다. 이 사실을 모르고 숲길로 이동해 강을 건너려던 성 노엘 샤바넬 신부도 다음 날 한 휴런족 인디언 배교자에게 소유물을 모두 강탈당하고 도끼에 맞아 순교하였다. 몇몇 정찰병이 성 가롤로 가르니에의 시신을 발견해 인근에 매장했다가 이듬해인 1650년 퀘벡으로 옮겨 모셨다. 성 요한 드 브레뵈프 신부와 성 가롤로 가르니에 신부를 포함한 7명의 동료 순교자들은 1925년 6월 21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30년 6월 29일 로마에서 같은 교황에 의해 ‘캐나다의 순교자’(수호성인) 또는 ‘북미의 첫 순교자들’로서 성인품에 올랐다. 그들의 기념일은 로마 보편 전례력의 9월 26일에 추가되었으나 1969년 전례력 개정 이후부터 성 이사악 조그가 순교한 다음 날인 10월 19일(10월 18일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과 중복을 피하고자)로 변경해 기념하고 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12월 7일 목록에서 캐나다의 온타리오주(Ontario州)에서 예수회 신부인 성 가롤로 가르니에가 예비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던 중 이교도의 침입으로 중상을 입고 도끼에 맞아 순교했다고 전해주었다. 그리고 10월 19일 목록에서 성 요한 드 브레뵈프와 성 가롤로 가르니에 신부와 동료 순교자들의 선교활동과 순교 사실을 전하며 그날 그들 여덟 명 모두를 함께 기념한다고 기록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