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토마스 아퀴나스(또는 토마스 데 아퀴노 Thomas de Aquino 또는 토마스 Thomas)는 이탈리아 로마(Rome)와 나폴리(Napoli) 중간에 있는 로카세카(Roccasecca)의 가족성(城)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퀴노의 백작 란둘프(Landulph)와 신심 깊은 어머니 테오도라(Theodora)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불과 다섯 살의 나이에 몬테카시노(Monte Cassino)의 베네딕토회 수도원으로 보내져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 1239년경에는 더 좋은 교육을 받아 훌륭한 지도자가 되길 바라는 가족의 뜻에 따라 나폴리 대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그곳에서 그는 도미니코회의 스승을 만나 큰 영향을 받으면서 가족의 뜻과는 달리 수도자가 되려는 뜻을 품게 되었다. 그는 1244년 가족들의 완강한 반대를 물리치고 결국 도미니코회(설교자회)에 입회하였다. 이때 가족들은 그를 설득하는 것이 어려워지자 강제로 데려다가 15개월 동안이나 로카세카 성에 감금시킨 일도 있었다. 그러나 성 토마스는 뜻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1245년에 다시 수도회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는 1245년부터 3년 동안을 파리(Paris)에서 수학하고, 1248년부터 쾰른(Koln)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그는 프랑스 파리와 독일 쾰른에서 당시 저명한 신학자로 이름난 성 대 알베르토(Albertus Magnus, 11월 15일)의 문하생으로 공부하여 1256년에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1250년과 1251년 사이의 어느 때에 사제품을 받았다. 늘 겸손하고 진중하게 학문 연구에 열중했던 성 토마스는 ‘말 없는 황소’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의 스승이었던 성 대 알베르토는 그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이 말 없는 황소는 언젠가 그의 울부짖음으로 전 세계를 가득 채울 것이다.” 1252년부터 그는 주로 파리와 이탈리아의 나폴리(Napoli), 아나니(Anagni), 오르비에토(Orvieto), 로마(Roma), 비테르보(Viterbo) 등지에서 강의했고, 1259~1264년 사이에 “대이교도대전”(對異敎徒大全, Summa Contra Gentiles)을 마무리 지으면서 그의 저작 중 가장 유명한 “신학대전”(神學大全, Summa Theologiae)의 집필에 착수하였다. 그의 미완성 대표작인 “신학대전”은 현대 가톨릭 신학의 뿌리로 받아들여질 만큼 위대한 신학 사상을 담고 있다. 로마에서 시작한 집필 작업은 파리로 옮겨서도 계속되었다. 하루는 하느님께서 성 토마스에게 나타나셔서 “토마스야 너는 나에 대해 참 잘 썼다. 그 대가로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그는 “주님, 당신 외에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렇듯 하느님의 축복 속에 그의 집필 작업이 계속되었으나, 1273년 12월 6일 성 니콜라오(Nicolaus) 축일 미사 중에 강렬한 하느님 체험을 한 후부터 돌연 모든 집필 작업을 중단했다. 당시 “신학대전” 제3부 ‘속죄’에 대한 부분을 집필 중이던 그에게 왜 더는 글을 쓰지 않느냐는 친구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하느님께서 발현하셨을 때 형언하기 어려운 신비를 보았다. 그동안 내가 오랜 기간 심혈을 기울여 쓴 것은 이 신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결국 “신학대전”은 미완의 대작으로 남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지적 능력을 통해 하느님을 더 깊이 탐구하고 철저히 섬긴 위대한 학자였다. 동시에 그는 지극히 겸손하고 거룩한 사람이었다. 그는 환시와 탈혼, 그리고 하느님의 계시를 체험했다. 1261년 교황 우르바노 4세(Urbanus Ⅳ)는 당시 몇몇 나라에서 지키던 성체 축일을 보편교회 전례력에 포함하기 위해 미사 전례문과 성무일도(시간 전례)에 들어갈 성체 찬미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당대 석학인 성 토마스와 성 보나벤투라(Bonaventura, 7월 15일)에게 그 일을 맡겼다. 어느 날 우연히 성 토마스의 찬미가를 본 성 보나벤투라는 그 완벽함에 감탄해 자신이 작성한 찬미가를 찢어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교황은 성 토마스가 작성한 것으로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 성무일도와 미사 전례문을 정했다. 그는 이외에도 오늘날 가톨릭교회에서 사용하는 많은 찬미가를 지었고, 주님의 기도(Pater Noster), 사도신경(Symbolum Apostolicum) 그리고 성경 일부에 대한 주해서도 썼다. 파리로 돌아온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1269년부터 다시 파리 대학에서 강의했는데, 이 시기에 그의 학문은 절정에 이르렀다. 하지만 수도자의 교수직 임용을 반대하는 교구사제와의 논쟁과 방해에 부딪혔고, 아베로에스 학파(Averroistae)와의 논쟁도 있었다. 또한 벨기에 브라반트(Brabant)의 시게르(Siger)와 요한 페캄(John Pecham) 그리고 파리의 주교인 에티엔 탕피에(Etienne Tempier)의 철학적 가르침을 반대하여 논쟁하기도 했다. 1272년 이후 이탈리아에 머물며 수도회 학교와 나폴리 대학에서 강의하던 그는 1274년 제2차 리옹(Lyon) 공의회에 참석하여 동방과 서방 교회의 재일치 가능성을 논의하라는 교황 복자 그레고리오 10세(Gregorius X, 1월 10일)의 부름을 받았다. 공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리옹으로 가던 중 병에 걸려 나폴리와 로마 사이에 있는 포사노바(Fossanova)의 시토회 수도원에 머물다가 1274년 3월 7일 선종하였다. 그의 유해는 1369년 1월 28일 프랑스의 툴루즈(Toulouse)로 옮겨졌고, 그곳의 성 자코뱅(Jacobins) 수도원 성당에 안치되었다. 옛 “로마 순교록”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로마 보편 전례력에서는 그가 선종한 날인 3월 7일에 그의 축일을 기념했었다. 1969년 로마 보편 전례력을 개정하면서 그의 축일이 대체로 사순시기와 겹치는 관계로 유해 이장일인 1월 28일로 옮겨 보편 전례력 안에서 기념하게 되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도 1월 28일 목록에서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업적과 선종 그리고 유해 이장에 대해 기록하였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1323년 7월 18일에 교황 요한 22세(Joannes XX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고, 1567년에는 교황 비오 5세(Pius V)에 의하여 교회 학자로 선언되었다. 그리고 1880년에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하여 모든 대학교와 대학 그리고 학교의 수호성인으로 선언되었다. 그에게 붙여진 칭호는 ‘보편적 박사’(Doctor Communis) 또는 ‘천사적 박사’(Doctor Angelicus)이다. 또한 교황 레오 13세는 회칙 “영원하신 아버지”(Aeterni Patris, 1879년)에서 모든 신학생이 그의 사상을 연구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중 “사제 양성에 관한 교령”(Optatam Totius) 16항에서도 “구원의 신비를 되도록 온전히 밝히고자 신학생들은 토마스 성인을 스승으로 삼아 사변의 도움으로 그 신비를 더욱 깊이 깨닫고, 그 신비들 사이의 연관성을 통찰하도록 배워야 한다.”라고 강조하였다. 이처럼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중세를 대표하는 그리스도교 철학자이자 신학자이며, 서구 사상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상가였다. 그의 사상은 그의 사후부터 현재까지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을 지배하고 있고, 그의 저서들은 신앙과 이성 간의 예리한 구분으로 특징지어지는 탁월한 저작들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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