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자 토마스 플럼트리는 영국 잉글랜드 중동부 링컨셔(Lincolnshire) 출신으로 옥스퍼드(Oxford)의 코르푸스 크리스티 대학(Corpus Christi College, 성체 대학)에서 수학한 후 사제품을 받고 그곳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여왕 치하에서 교수직을 계속하려면 여왕에 대한 충성 서약과 신앙을 바꿔야 했기에 교수직을 사임했다. 그 후 가톨릭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면서 1569년 잉글랜드 북부 지방에서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을 폐위시키고 스코틀랜드의 메리(Mary) 여왕을 왕위에 앉히려는 봉기(The Rising of the North)가 일어났다. 웨스트모얼랜드(Westmorland)의 제6대 백작인 찰스 네빌(Charles Neville)과 노섬벌랜드(Northumberland)의 제7대 백작인 복자 토마스 퍼시(Thomas Percy, 8월 22일)가 이끄는 군대가 1569년 11월 더럼(Durham)을 점령했다. 이때 복자 토마스 플럼트리는 북부 저항군의 군종신부 겸 설교가로 활동했고, 12월 4일 더럼 대성당에서 공개적으로 미사를 봉헌하였다. 그 후 북부 저항군의 봉기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그 역시 미사 도중 체포되어 더럼 성에 갇혔다. 그는 가톨릭 신앙을 부인하고 여왕에 대한 충성 서약을 하면 자유를 주겠다는 제안을 거부하고 반역죄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이제 하느님을 위해 죽을 시간이 왔기에 더는 이 세상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는 1570년 1월 4일 더럼의 장터로 끌려가 교수형과 극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복자 토마스 플럼트리 신부는 1886년 12월 29일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순교한 날인 1월 4일에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그리고 2000년에 잉글랜드와 웨일스 교회의 새 전례력이 교황청에서 승인된 후에는 1970년 10월 25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성된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40위 순교자’(The Forty Martyrs of England and Wales)와 종교개혁 시대에 순교한 모든 복자 · 성인들이 ‘영국의 순교자’(The English Martyrs)라는 이름으로 5월 4일 전례 안에서 기념하게 되면서 복자 토마스 플럼트리 또한 그날 함께 축일을 기념하게 되었다. 이날은 종교개혁 시대 영국에서 순교한 영국 성공회의 순교자와 성인들의 기념일과 같은 날이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1월 4일 목록에서 복자 토마스 플럼트리 신부가 가톨릭교회에 대한 충성심으로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치하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영국 더럼에서 용감하게 교수형을 받아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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