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프란치스카(Francisca, 또는 프란체스카[Francesca])는 1384년 이탈리아의 부유한 귀족인 부소(Busso) 가문의 파올로(Paolo)와 자코벨라(Giacobella)의 딸로서 로마 중심부인 트라스테베레(Trastevere)에서 출생하였다. 부유한 귀족이면서도 열심한 신자 집안에서 태어난 성녀 프란치스카는 어려서부터 수도 생활에 대한 성소(聖召)를 키워갔다. 그녀는 자신의 교육과 영적 지도를 담당했던 베네딕토회 수도승과 의논하여 일찍부터 금욕적인 생활을 실천했다. 11살 무렵 수도 성소를 실천하고자 아버지의 허락을 구했으나 단호히 거절당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이미 부유한 귀족 가문의 청년과 그녀의 결혼을 약속한 상태였다. 결국 성녀 프란치스카는 13살이 된 1396년 인근의 부유한 영주인 로렌초 폰치아니(Lorenzo Ponziani)와 결혼하여 40여 년 동안 이상적인 결혼생활의 모범처럼 살았다. 그들은 자녀 여섯을 두었으나 둘은 어린 나이에 사망하였다. 성녀 프란치스카는 같은 집에서 살던 동서 바노차(Vanozza)와 서로의 이상이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두 여인은 관대한 마음으로 결혼생활을 하며 기도와 고행과 자선을 실천하여 내적인 거룩함을 지켜가면서 영적인 우정을 이어갔다.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중병에 걸려 고생하던 성녀 프란치스카는 성 알렉시오(Alexius)의 환시를 본 뒤로 회복되었고, 1400년 그녀의 첫째 아들인 요한 바티스타(Giovanni Battista)가 태어날 때까지 동서와 함께 성령(Sancto Spiritu) 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헌신하였다. 성녀 프란치스카는 어려서부터 금욕적인 기질이 강했고,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대하여 깊은 애정을 표현하곤 하였다. 그래서 흑사병과 같은 전염병과 내전으로 인해 사회가 혼란스러웠을 때, 더욱 적극적인 자선활동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고 실천하였다. 특히 재앙의 희생자들을 돕기 위해 자신의 보석까지 팔았다. 그리고 동서인 바노차와 함께 로마의 걸인들을 위해 조직적인 봉사활동을 전개하여 높은 성덕을 쌓아 나갔다. 그런데 그녀의 집안이 정치적 격변기에 커다란 곤경에 처하기도 했다. 1408년에 대립교황의 편이었던 나폴리(Napoli)의 왕 라디슬라오(Ladislao)가 로마를 점령하고 약탈할 때 여자들은 남아 있었으나 교황의 편에 서서 지원했던 남편 로렌초 폰치아니는 피신해야만 했다. 게다가 폰치아니(Ponziani) 성이 약탈당하고 캄파니아(Campania)에 있는 집도 불에 타버렸다. 그리고 1413년의 또 다른 흑사병 때문에 둘째 아들 에반젤리스타(Evangelista)가 희생되자 그녀는 자기 집을 아예 병원으로 개조하였다. 불행은 계속 이어져 2년 후에는 그녀의 딸 아녜스(Agnes)마저 사망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모든 슬픔을 이겨내며 엄격한 참회의 삶을 살았다.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돌보며 놀라운 치유의 능력을 발휘한 것도 이때였다. 그녀는 자신의 이러한 능력이 수호천사의 존재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수호천사는 그녀 외에는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았었다. 1414년경에 비로소 평화가 찾아왔고, 남편의 추방령도 해제되어 돌아오고 재산도 되찾았으나 남편의 건강은 매우 나쁜 상태였다. 성녀 프란치스카는 남편을 지극정성으로 간호하는 한편 그녀의 모범을 따르는 귀족 부인 등과 함께 자선활동을 계속하면서 봉쇄 생활을 하지 않고 세상 안에서 자선을 실천하는 새로운 형태의 수도 공동체를 이루어 살겠다는 결심을 했다. 1425년 이미 두 명의 아이를 잃은 그녀는 영적 지도자인 베네딕토회 수도승의 도움을 받아 서약은 하지 않지만, 성 베네딕토의 규칙을 따르는 공동체를 조직하였다. 이렇게 탄생한 수도 공동체는 1433년 3월 25일, 처음에는 마리아의 오블라티회(Oblate di Santa Maria)로 알려졌으나 나중에 캄피돌리오(Campidoglio) 근처에 있는 ‘스페키의 탑’ 근처에 있다고 하여 토르 데 스페키의 오블라티회(Oblate di Tor de’ Specchi)로 알려졌고, 다시 현재의 성 프란치스카 로마나의 오블라티회(Oblate di Santa Francesca Romana)로 명칭이 바뀌었다. 1436년에 남편이 죽은 후 성녀 프란치스카는 오블라티회 수녀원에 입회하였고, 원장이 되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남은 4년 동안 엄격한 생활과 더불어 자선 사업에 전념하였다. 성녀 프란치스카가 직접 남긴 글은 전해지지 않으나 그녀의 전기 작가인 조반니 마티오티(Giovanni Mattiotti, +1450년)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녀는 여러 번 환시를 보고 자주 탈혼에 빠졌으며, 수호천사를 눈으로 보거나 연옥과 지옥에 관한 계시를 보기도 했다. 또한 치유의 기적을 행하고 예언의 은사도 받았다. 그녀는 서방 교회의 분열이 곧 종식될 것임을 예언하기도 했다. 성녀 프란치스카는 아들을 방문하러 갔다가 병을 얻어 자신이 예언한 1440년 3월 9일 로마에서 선종하였다. 그녀가 안치된 포로 로마노(Foro Romano)의 산타 마리아 누오바(Santa Maria Nuova) 성당은 일찍부터 그녀를 경배하는 순례지가 되었다. 현재 이 성당은 그녀를 기념해 산타 프란체스카 로마나(Santa Francesca Romana) 성당으로 명명되었다. 성녀 프란치스카는 1608년 5월 29일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교황은 시성을 승인하는 칙서(Caelestis aquae flumen) 안에서 그녀의 기도와 고통이 서방 교회의 분열(1378~1449년)을 치유하고 교황의 아비뇽 체류를 끝내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했다. 1925년에 교황 비오 11세(Pius XI)는 성녀가 밤낮으로 어려운 이웃을 보살피는데 수호천사의 특별한 보호를 받았으며, 칠흑 같은 로마의 밤거리를 다니는 동안 수호천사가 동행하며 등불로 길을 비춰주었다는 전설에 근거해 그녀를 자동차 운전자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그녀는 또한 이탈리아 가정주부와 미망인의 모범으로서 큰 공경을 받고 있다. 옛 “로마 순교록”은 3월 9일 목록에서 로마의 미망인인 성녀 프란체스카가 고귀한 가문 출신으로 거룩한 삶과 기적의 은사로 유명했다고 전해주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같은 날 목록에서 어린 나이에 결혼하여 40년 동안 결혼생활을 한 성녀 프란치스카는 흠잡을 데 없는 덕행을 지닌 아내이자 어머니였으며 신앙과 겸손, 인내심에서 탁월했다고 했다. 또한 어려운 시기에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고 병자들을 돌봤으며 남편이 죽은 후에 성 베네딕토의 규칙을 따르는 오블라티회에 들어가 여생을 보냈다고 기록하였다.♣
|
번호 | 성인명 | 제목 | 작성자 | 작성일 | 조회수 | 추천수 |
---|---|---|---|---|---|---|
10 | [프란치스카(3. ...] | 로마의 성녀 프란체스카 로마나 봉헌자 수도원 | 주호식 | 2018/08/07 | 1970 | 1 |
9 | [프란치스카(3. ...] | 명화와 성인: 어려운 사람들의 성인 로마의 성녀 프란치스카 | 주호식 | 2017/03/15 | 1584 | 1 |
8 | [프란치스카(3. ...] | 교회가 수호성인을 정하는 뜻은? | 주호식 | 2015/03/11 | 1151 | 1 |
7 | [프란치스카(3. ...] | 교회의 빛나는 인물들: 로마의 성녀 프란체스카 | 주호식 | 2014/05/12 | 2483 |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