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도미니쿠스(Dominicus, 또는 도미니코)는 1170년 8월 8일 에스파냐 북부 부르고스(Burgos) 지방의 칼레루에가(Caleruega)에서 펠릭스 데 구즈만(Felix de Guzman)과 아자(Aza)의 복녀 요안나(Joanna, 8월 2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신앙심 깊은 어머니에게 훌륭한 가정 교육과 신앙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의 형 두 명은 그가 태어났을 때 이미 사제가 되어 교회에 봉사하고 있었고, 그 또한 7살부터 삼촌 신부 밑에서 기초 학문을 수학하고 복사로서 미사 전례를 도우며 사제 성소를 키워갔다. 그는 1184~1194년 사이에 팔렌시아(Palecia)의 대학에서 논리학, 수사학, 철학, 신학 등을 공부한 후 1196년경 사제품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 후 그는 오스마(Osma) 교구 주교좌성당의 의전 사제단에 참여하여 함께 시간 전례(성무일도)를 바치며 공동생활을 했다. 그리고 1201년 의전 수도회의 부원장으로 선출되어 청빈 생활과 관상 생활에 더욱 몰두했다. 그러던 중 성 도미니코는 1203년과 1205년에 오스마의 주교인 복자 디다코 데 아제베도(Didacus de Azevedo, 2월 6일)를 수행해 북유럽을 여행하면서 인생의 전환기를 맞이했다. 그는 프랑스 남부 랑그도크(Languedoc)를 여행하면서 그곳에서 발생한 알비파 이단으로 인해 교회가 겪고 있는 고통을 목격하며 교회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깨닫게 되었다. 또한 1206년 프랑스 남부 몽펠리에(Montpellier)에서 알비파(Albigenses), 발두스파(Waldenses), 카타리파(Cathari)에 대항하는 시토회 출신 교황 사절을 만난 후 이단을 척결하는 사명에 투신할 결심을 했다. 그는 1206년 말에 알비파에서 가톨릭으로 되돌아온 여성들을 위해 프루이유(Prouille)에 여자 수도원을 설립하고 가톨릭의 진리를 설교하는 데 전념했다. 1208년 교황대사 베드로 카스텔란이 알비파에 의해 피살되었을 때, 교황 인노첸시오 3세(Innocentius III, 1198~1216년 재위)는 그들을 상대할 십자군을 조직하고 그 총사령관으로 몽포르의 시몽 4세(Simon IV de Montfort) 백작을 임명했다. 알비파와의 전투는 7년이나 계속되었다. 성 도미니코는 십자군을 따라다니며 이단자를 상대로 설교에 힘썼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1214년 시몽 4세가 그에게 성(城)을 하나 주었는데, 이때 그는 여섯 명의 동료들과 함께 알비파의 회개를 위해 활동할 공동체를 설립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이듬해 툴루즈(Toulouse)로 옮겨 교황 사절의 동의와 툴루즈 교구 풀크(Foulques) 주교의 승인을 받아 수도원을 설립했다. 풀크 주교는 그에게 교구 전역을 순회하며 신자들에게 참된 신앙과 윤리를 지키도록 설교하도록 요청했다. 성 도미니코와 풀크 주교는 1215년 제4차 라테라노(Laterano) 공의회가 열린 로마를 방문해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설교를 목적으로 하는 새 수도회의 설립 승인을 요청했으나 구두 약속만 듣고 돌아왔다. 하지만 1216년 말 다시 로마를 방문한 성 도미니코는 후임 교황인 호노리오 3세(Honorius III, 1216~1227년 재임)에게 ‘설교자들의 수도회’(Ordo Fratrum Praedicatorum)라는 이름으로 도미니코 수도회(설교자회)의 설립을 공식 승인받았다. 의전 수도회의 영향을 받은 성 도미니코는 수도 생활과 사목 활동을 적절하게 조화시킨 영성 생활을 실천하고자 했다. 그는 수도자들이 청빈, 정결, 순명의 복음삼덕(福音三德)의 서원을 하고 관상 생활을 지향하도록 했다. 그리고 수도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충실히 설교 준비를 하도록 교육에 힘쓰며, 참회와 금욕 생활을 실천하면서 탁발 제도도 허용했다. 성 도미니코가 설립한 설교자회는 교회와 교황과 신앙의 진리에 충실한 하느님 중심적이며, 그리스도론적이고 사제적인 영성 생활을 실천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신심 운동에서 자연스럽게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 운동을 도출해 냈고, 특별히 묵주기도의 전통을 가톨릭교회 안에 널리 전파했다. 설교를 통한 영혼 구원이란 설립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도자들은 최선을 다해 공부해야 했다. 이런 정신에 따라 도미니코 수도회는 설립 초기에 이미 성 대 알베르토(Albertus Magnus, 11월 15일)와 성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월 28일)와 같은 위대한 신학자들을 배출했다. 설교자회의 설립 승인을 받은 성 도미니코는 여생을 수도회의 정착과 발전을 위해 보냈는데, 회원들과 함께 이탈리아, 에스파냐, 프랑스, 헝가리 등을 순회하며 설교하여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많은 회원이 새로 입회하면서 수도회도 빠르게 정착했고, 회헌에 따라 영성과 지성의 조화로운 결합 속에 대중들의 요구를 반영해 회개 운동과 선교 활동을 꾸준히 전개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1220년에 볼로냐(Bologna)에서 설교자회의 첫 번째 총회를 마치고, 그 이듬해인 1221년 8월 6일 볼로냐의 수도원에서 선종하였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을 지켜보던 제자들에게 “서로서로 형제들 간에 사랑하라, 겸손하라, 청빈을 자발적으로 실천함으로써 영적인 보화를 만들어가도록 하라.”는 말씀을 남겼다. 그가 세상을 떠날 무렵 이미 유럽에는 60여 개의 수도원과 수녀원이 설립되었고 500여 명의 수도자가 생활하고 있었다. 성 도미니코는 1234년 교황 그레고리오 9세(Gregorius IX)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고, 천문학자와 설교자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옛 “로마 순교록”은 그의 성덕과 업적을 전하면서 교황 바오로 4세(Paulus IV, 1555~1559년 재위)의 교령에 의해 그의 축일을 8월 4일에 기념한다고 했다. 1969년 로마 보편 전례력 개정 이후에는 8월 8일에 기념하는데,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도 알비파 이단으로 황폐해진 지역에서 겸손한 설교의 봉사자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설교자회를 창설한 성 도미니코가 8월 6일 선종했으나 8월 8일에 전례 안에서 기념한다고 기록하였다. 교회 미술에서 성 도미니코는 보통 검은색과 흰색의 수도복을 입고 이마에 별이 붙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성인의 어머니가 꿈에 이마에 별을 달고 있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신의 아기를 보았다는 이야기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후대 회원들에 의해 도미니코회 문장에 횃불을 입에 문 개가 등장하는데, 이 또한 성 도미니코의 어머니가 꾼 태몽에서 유래한다. 어느 날 성지 순례 중에 그의 어머니는 자신의 배에서 횃불을 입에 문 개 한 마리가 튀어나와 그 횃불로 온 세상을 불태우는 꿈을 꿨다. 어머니는 이 꿈이 장차 아들이 말[說]로써 세상을 불태우리라는 것을 미리 알려준 태몽으로 이해했다. 실제로 성 도미니코는 뛰어난 언변으로 당대 교회에 큰 어려움을 안긴 알비파 이단을 대적했다. 그리고 동정 성모에게 묵주를 받는 성 도미니코의 모습도 교회 미술에 자주 등장한다. 이는 평소 어려울 때마다 성모님의 전구를 청하던 성 도미니코에게, 1210년 어느 날 성모님이 나타나 묵주를 주시며 묵주기도를 널리 전파하라는 말씀을 주셨다는 전승에서 유래한다. 사실 성 도미니코와 도미니코 수도회는 묵주기도를 대중화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 외에도 순결의 상징인 백합이나 성경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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