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헤드비지스(Hedwigis)는 독일 바이에른(Bayern)의 안덱스(Andechs) 성에서 베르톨트(Berthold) 공작의 여덟 자녀 중 하나로 태어났다. 그녀는 프랑코니아(Franconia)의 키칭엔(Kitzingen)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고, 12살 때에 18살의 폴란드 왕자이자 나중에 슐레지엔(중부 유럽의 역사적 지역으로 대부분 폴란드 남서부 지역이나 체코, 슬로바키아, 독일에 걸쳐 있다)의 공작이 된 하인리히 1세(Henry the Bearded)와 결혼하였다. 남편은 매우 열심하고 용기 있는 사람으로 아내의 신앙생활과 자선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그는 아내의 요청에 따라 폴란드 브로츠와프(Wroclaw)의 성 아우구스티노 참사 수도회의 설립을 후원하였고, 그 외에도 여러 수도회에 아낌없는 후원을 보냈다. 또한 1202년 노이마크트(Neumarkt)의 병원에서 나환자 여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는 아내의 활동에 감동해 트레브니츠(Trebnitz)에 있는 자신의 땅에 시토회 수녀원을 지어 기부하였다. 이 수녀원은 슐레지엔(독일어 지명으로 영어로는 실레지아[Silesia], 폴란드어로는 실롱스크[Slask]로 부른다) 지방에 세워진 첫 번째 여자 수도원이다. 성녀 헤드비지스와 하인리히 1세 사이에는 7명의 자녀가 있었다. 1238년에 남편과 사별한 성녀 헤드비지스는 남편의 도움을 받아 세운 트레브니츠 수녀원에서 수도 생활에만 전념하여 큰 덕을 쌓았다. 그녀는 농사를 짓기 위해 척박한 슐레지엔 땅을 개간하고 많은 독일 이주민을 초대해 새로운 도시와 촌락들을 만들었다. 그렇게 늘 주위 사람들의 물질적 · 영성적 이익을 위해 헌신했지만, 성녀 헤드비지스 자신은 극도의 가난을 실천하며 하느님만을 섬겼다. 또한 수도복을 입고 딱딱한 침대에서 자며 추운 날씨에도 신발을 손에 들고 맨발로 다니며 기도 생활에 전념하는 등 고행과 절제의 생활을 실천했는데, 적어도 한겨울만은 신발을 신고 다니라는 브로츠와프 주교의 조언에 순종했다고 한다. 헤트비히, 야드비가(Jadwiga) 등으로도 불리는 성녀 헤드비지스는 1243년 10월 15일 자기 딸 제르트루다(Gertrude)가 원장으로 있던 트레브니츠의 시토회 수녀원에서 세상을 떠나 남편과 함께 수녀원 성당에 안치되었다. 살아 있는 동안에도 이미 성인으로 불렸던 그녀는 1267년 3월 26일 교황 클레멘스 4세(Clemens IV)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고, 폴란드와 슐레지엔 지방의 수호성인으로서 큰 공경을 받고 있다. 20세기에 와서 성녀 헤드비지스는 폴란드와 독일의 화해의 수호자로서 공경받았다. 옛 “로마 순교록”은 폴란드의 공작부인인 성녀 헤드비지스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다가 10월 15일에 선종했는데, 교황 인노첸시오 11세(Innocentius XI)에 의해 10월 17일에 축일을 기념하게 됐다고 전해주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성녀 헤드비지스가 10월 15일에 자신이 설립한 트레브니츠 수녀원에서 선종했음을 언급하며,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헌신하고, 가난한 사람과 나병 환자를 위한 병원을 설립했으며, 남편과 사별한 후 여생을 수도원에서 보낸 바이에른 출신의 폴란드 공작부인인 성녀 헤드비지스의 축일을 10월 16일 옮겨 기념한다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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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 성인명 | 제목 | 작성자 | 작성일 | 조회수 | 추천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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