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동부 부르고뉴(Bourgogne) 근처 세뮈르(Semur)의 달마티우스(Damatius) 백작의 장남으로 태어난 성 후고(Hugo)는 15세 때에 프랑스의 베네딕토회 클뤼니 수도회에 입회하여, 2년 후인 1040년에 첫 서약을 하고 1044년에 사제품을 받았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겨우 25세에 불과한 나이로 1049년 1월에 세상을 떠난 성 오딜로(Odilo, 1월 1일) 아빠스를 계승하여 수도회의 아빠스가 된 것이었다. 그의 영향은 수도원 밖에서도 매우 컸다. 그는 아홉 명에 달하는 교황의 고문 역할을 하였고, 클뤼니 수도회는 교황 성 레오 9세(Leo IX, 4월 19일)와 성 그레고리오 7세(Gregorius VII, 5월 25일)가 시작한 '그레고리오 개혁'을 충실하게 후원하였다. 그래서 그는 성직매매를 근절시키고 성직자의 규율을 확립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또 성 후고는 1050년에 교황 레오 9세와 함께 로마로 와서는 성변화와 유아세례를 반대하여 이루어진 투르(Tours)의 베렌가리우스(Berengarius) 이단을 단죄하는 교회 회의에 참석하였고, 1057년에는 교황대사로 임명되어 프랑스의 앙리 4세와 헝가리의 안드레아스 사이의 평화 협정에도 기여하였다. 또한 그는 교황 니콜라우스 2세(Nicolaus II)를 도와서 교황 선출에 관한 칙령을 작성하는 등 교회사에 남을 큰 업적을 많이 남겼다. 그는 심리적인 직관과 외교적인 수완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의 영향을 받아 더욱 위대한 인물이 된 이로는 성 베드로 다미아니(Petrus Damiani, 2월 21일) 추기경과 교황 성 그레고리우스 7세 등이 손꼽힌다. 1109년 4월 29일 클뤼니 수도원에서 세상을 떠난 그는 1120년 1월 1일 교황 칼리스투스 2세(Callist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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