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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히야킨투스(Hyacinthus, 또는 히야친토)는 서폴란드의 유명한 귀족 가문 출신으로 1183년경 폴란드 남서부 슐레지엔(Schlesien)의 오폴레(Opole) 근처 크로스 슈타인(Gross Stein, 오늘날 폴란드 남부의 카미엔 실롱스키[Kamien Slaski]) 성에서 태어났다. 그는 크라쿠프(Krakow)와 프라하(Prague)에서 초등교육을 받고 이탈리아의 볼로냐(Bologna)에서 법학과 신학 박사 학위를 받은 후 사제품을 받고 폴란드로 돌아와 크라쿠프 교구장의 비서가 되었다. 그 후 삼촌인 이보 콘스키(Ivo Konski) 신부가 크라쿠프의 주교가 되자 그는 대성당 참사 위원이 되었고, 1218년경 삼촌 주교가 로마(Roma)를 방문할 때 동행하였다. 이때 그와 함께한 동료로는 가까운 친척인 복자 체슬라오(Ceslaus, 7월 15일)와 젊은 귀족으로 독일인인 하인리히(Heinrich)가 있었다. 그들은 마침 로마에 와 있던 성 도미니코(Dominicus, 8월 8일)의 기적 이야기를 듣고 그의 성덕에 감화되어 즉시 도미니코 수도회(설교자회, Ordo Fratrum Praedicatorum, O.P.)에 입회하기를 청했다. 성 히야친토와 동료들은 얼마 전 설립된 도미니코 수도회의 초창기 회원들로서 수련을 받고 1220년 성녀 사비나 대성당(Basilica di Santa Sabina all’Aventino)에서 성 도미니코로부터 직접 수도복을 받았다. 성 도미니코는 1221년에 몇몇 수도자들을 북쪽 지방의 선교사로 파견하면서 성 히야친토를 그 대표로 임명하였다. 성 히야친토는 폴란드로 가는 길에 오스트리아 남부 카린티아(Carinthia/Karnten) 지방의 프리에자흐(Friesach)에 독일어권 최초의 도미니코회 수도원을 세우고 독일인 하인리히를 수도원장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1222년 가을에 크라쿠프에 돌아와 삼촌인 이보 콘스키 주교가 준 삼위일체 성당과 수도원에 폴란드 최초의 도미니코회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성 히야친토는 삼위일체 수도원을 중심으로 여러 곳을 순회하면서 활발한 설교와 선교 활동을 펼쳤다. 그의 뛰어난 설교 덕분에 지원자들이 모이면서 1227년 그단스크(Gdansk)에 새로운 수도 공동체를 설립하고, 이어서 폴란드의 여러 곳에 수도원을 설립했다. 한 번은 성 히야친토가 프로이센(Preussen) 지역 선교를 위해 그단스크로 가려고 비스와강(Wisla R.)에 이르렀을 때, 장마로 강물이 불어난데다 다리도 배편도 없는 막막한 상황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는 땅에 무릎을 꿇고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며 기도를 한 후 강물 위에 십자가를 긋고 나서 동료들과 함께 수도복 위에 걸쳤던 망토를 강 위에 펴고 그 위에 서서 강을 건넜다고 한다. 마치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의 기적 이야기’(마태 14,22-33)와 유사한 이 기적은 그의 시성 조사 서류에도 기록되었다. 그는 선교 지역을 프로이센, 포메른(Pommern), 리투아니아(Lithuania) 지역으로 확장해 나갔고, 1229~1233년에는 오늘날 우크라이나의 키이우(Kyiv)에 머물며 선교 활동을 했다. 그리고 다시 발트해를 건너 스칸디나비아반도의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등지에서도 선교하였다. 그리고 다시 남쪽으로 내려와 오늘날 우크라이나 서부 리비우(Lviv)를 비롯해 여러 곳에 공동체를 설립하였다. 성 히야친토는 표징이나 기적보다는 말씀의 힘으로 사람들을 개종시키고자 했다. 그래서 사도직 수행에 있어서 교육 활동을 상당히 강조하였다. 1238년 이후 타타르족(Tatars)의 침입으로 많은 수도원이 파괴되어 선교 활동을 지속하기 어려울 때도 있었지만, 그는 수도원 복구를 위해 큰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유럽의 북쪽과 동쪽 지역으로 더 멀리 가려던 그의 선교 계획은 타타르족의 침입으로 좌절되고 말았다. 성 히아친토는 성모 신심으로 유명했는데, 성모 마리아의 전구를 통해 많은 치유 기적을 행했다고 한다. 성모님과 관련한 유명한 일화가 하나 전해지는데, 성 히야친토가 키이우의 한 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하고 있다가 타타르족의 습격을 받았을 때의 일이다. 성당이 불길에 휩싸이자 그는 성체를 모신 성합을 챙겨서 겨우 피신했는데, 성당 안의 성모상에서 “나의 아들아, 나를 두고 어디를 가느냐? 나도 함께 데려가다오.” 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그 성모상은 장정 여러 명이 들기도 어려울 만큼 무겁고 컸었다. 그는 이 음성을 듣자마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불길 속으로 들어가 성모상을 들어 올렸는데, 그 순간 성모상은 깃털만큼 가볍게 느껴졌다. 그가 성합과 성모상을 들고 피신하는 길에 드네프르강(Dnepr R.)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지만, 그가 강을 건널 때까지 강물이 말라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교회 미술에서 성 히야친토는 보통 도미니코 수도회의 수도복을 입고 한 손에는 성체를 모신 성광이나 성합을, 다른 한 손에는 성모상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주로 묘사된다. 타타르족의 침입 이후 선교 활동의 중심지인 크라쿠프로 돌아온 성 히야친토는 1257년 8월 15일 일흔을 넘긴 나이로 숨을 거둘 때까지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선교 활동을 계속했다. 성모 승천 대축일에 선종한 그의 유해는 크라쿠프의 도미니코 수도회 성당에 안장되었고, 1594년 4월 17일 교황 클레멘스 8세(Clemens VI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는 폴란드의 사도이자 북유럽의 사도로서 큰 공경을 받고 있다. 그의 축일은 성모 승천 대축일과의 중복을 피해 8월 16일로 정해졌다. 1913년 교황 성 비오 10세(Pius X)는 그의 축일을 8월 17일로 조정했는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따른 1969년의 전례력 개정 이후에는 선종한 날인 8월 15일에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도미니코 수도회에서는 지금도 8월 17일 전례에서 그를 기념하고 있다. 옛 “로마 순교록”은 8월 17일 목록에서 폴란드의 크라쿠프에서 설교자회의 성 히야친토 신부가 그달 16일에 주님 안에서 잠들었다고 전해주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8월 15일로 축일을 옮겨서, 폴란드 크라쿠프의 사제이자 설교자회 신부였던 성 히야친토가 성 도미니코로부터 설교자회를 전파하라는 임무를 받고, 동료인 복자 체슬라오와 하인리히라는 독일인과 함께 보헤미아(Bohemia)와 실레시아(Silesia) 지방에 복음을 전파했다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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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히야친토(8.1 ...] | 성 히야친토: 성모 신심 깊은 북유럽의 사도 | 주호식 | 2011/08/13 | 425 |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