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크레스켄티우스(또는 크레센시오)는 로마(Roma)의 귀족 출신인 성 에우티미오(Euthymius, 8월 29일)의 11살 난 아들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가 한창일 때 부모와 함께 세례를 받았다. 그는 박해를 피해 부모와 함께 로마를 탈출해 페루자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성 에우티미오가 세상을 떠났고, 어린 성 크레센시오는 체포되어 다시 로마로 끌려왔다. 로마에서 투르필리우스(Turpilius) 재판관에게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신앙을 고백한 그는 결국 도시 성벽 밖 살라리아 가도(Via Salaria)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그의 시신은 살라리아 가도에 있는 프리스킬라(Priscilla) 카타콤바에 묻혔고, 그곳은 곧 순례지가 되어 중세에 큰 공경을 받았다. 그의 유해는 11세기 중엽 로마에서 시에나(Siena)로 이장했고, 다른 유물들은 1606년에 토르토사(Tortosa)로 옮겨 모셨다. 그 뒤로 성 크레센시오는 시에나의 네 명의 수호성인 중 한 명으로서 큰 공경을 받고 있다. 시에나 출신 화가인 두초 디 부오닌세냐(Duccio di Buoninsegna)는 14세기 초에 시에나 주교좌성당에 설치할 마에스타(Maesta)를 제작했다. 성모자를 중심으로 좌우에 수많은 성인이 자리하고 있고, 그중에서 시에나의 네 명의 수호성인이 가장 앞줄에 무릎 꿇은 자세로 성모자를 경배하는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왼쪽부터 성 안사노(Ansanus, 12월 1일) 순교자, 성 사비노(Sabinus, 12월 7일) 주교 순교자, 성 크레센시오 순교자, 성 빅토르(Victor, 5월 14일) 순교자 순으로 그렸다. 옛 “로마 순교록”은 9월 14일 목록에서 성 에우티미오의 어린 아들인 성 크레센시오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중에 로마의 살라리아 가도에서 순교했다고 전해주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그에 대해서 더는 기록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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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 성인명 | 제목 | 작성자 | 작성일 | 조회수 | 추천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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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크레센시오(9. ...] | 성인 이름에 담긴 뜻: 크레센티오(Crescentius) | 주호식 | 2023/09/05 | 97 |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