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니콜라우스 타벨릭(Nicholaus Tavelic, 또는 니콜라오 타벨릭)은 크로아티아 남서부 달마티아(Dalmatia) 지방 아드리아 해안에 있는 시베니크(Sibenik)에서 귀족 가문의 아들로 1340년경에 태어났다. 그는 10대의 젊은 나이에 크로아티아 북부 브리비르(Bribir)에서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자다르(Zadar)나 스플리트(Split)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1365년경 사제품을 받았다. 그리고 1372년에 프랑스 출신의 성 데오다토 아리베르(Deodatus Aribert) 수사와 함께 보스니아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성 데오다토 아리베르 수사는 아마도 성 니콜라오 타벨릭과 비슷한 시기에 프랑스 남부의 로데스(Rodez)에서 태어나 작은 형제회 수사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보스니아에서 활동하며 복음을 전하던 작은 형제회 책임자는 여러 관구에 보스니아에 본거지를 두고 퍼져나가는 보고밀파(Bogomiles, 카타리파[Catharists]의 한 분파로 이원론[二元論]을 제창한 이단 사상) 이단의 개종을 위해 선교사를 보내달라고 호소하였다. 이에 60여 명의 작은 형제회 신부와 수사들이 선교사로 뽑혀 보스니아로 파견되었다. 이때 성 니콜라오 타벨릭과 성 데오다토 아리베르도 선교단의 일원으로 보스니아에 갔다. 보스니아 선교단은 12년 동안 보스니아 전역을 여행하며 설교와 모범적 삶을 통해 복음을 증거하고 보고밀파 이단의 개종을 이끌었다. 작은 형제회가 교황 보니파시오 9세(Bonifatius IX)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선교단의 활동으로 약 5만 명의 이단자들이 개종했다고 한다. 성 니콜라오 타벨릭과 성 데오다토 아리베르는 동료 회원일 뿐 아니라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그들은 1383년경 가을에 예루살렘(Jerusalem) 성지 관구로 함께 파견되었다. 아시시(Assisi)의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10월 4일)와 술탄과의 만남 이후 작은 형제회는 공식적으로 성지를 지키고 관리하는 사명을 맡게 되었다. 성 니콜라오 타벨릭과 성 데오다토 아리베르는 시온산(Mount Zion)에 있는 구세주 수도원으로 갔고, 그곳에서 여러 해 동안 아랍어를 배우며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관련된 성지를 돌보는 데 힘썼다. 그리고 그곳에서 미래에 함께 순교하게 될 쿠네오(Cuneo)의 성 스테파노(Stephanus)와 나르본(Narbonne)의 성 베드로(Petrus) 수사를 만났다. 성 스테파노에 대해 알려진 바가 거의 없는데, 그는 이탈리아의 제노바(Genova)에서 작은 형제회에 입회한 후 코르시카(Corsica)에서 활동하다가 1383년 예루살렘으로 파견되었다. 성 베드로는 프랑스 남부 나르본 출신으로 이탈리아에서 작은 형제회에 입회한 후 움브리아(Umbria)의 한 은둔소에서 15년 정도 지낸 후 1381년 예루살렘 성지로 파견되었다. 성 니콜라오 타벨릭과 세 명의 동료 수사들은 예루살렘 성지를 돌보며, 명시적으로 무슬림(Muslim)을 개종시키는 것이 금지되었음에도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강한 열망을 느꼈다. 그래서 신학자의 도움을 받아 이슬람 신앙의 논쟁적 요소를 반박하는 글을 썼다. 그들은 1391년 11월 11일 많은 무슬림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 작품을 전시하고, 이슬람교의 큰 축제인 바이람(Bairam)을 맞아 많은 무슬림이 모이는 예루살렘의 오마르 모스크(Mosque of Omar)에서 설교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이슬람의 법학자이자 판사인 카디(Kadi)에게 허가를 요청했지만 거부당하고 집 밖으로 쫓겨났다. 성 니콜라오 타벨릭과 동료들의 계획에 대한 소문이 즉시 퍼지면서 분노한 무슬림이 몰려왔고, 그들로부터 무자비하게 매를 맞은 후 감옥에 갇혔다. 그들은 자기들이 선포한 것을 공개적으로 철회하도록 요청받았으나 끝까지 거부하여 결국 사형선고를 받았다. 3일 동안 감옥에서 고문과 회유를 당한 성 니콜라오 타벨릭과 동료들은 마침내 11월 14일 야파 문(Jaffa Gate) 근처에서 참수형으로 처형되고 그 유해는 완전히 불태워졌다. 성 니콜라오 타벨릭과 동료들의 순교 사실은 그 장면을 직접 목격한 예루살렘 성지 관구 책임자에 의해 자세한 보고서와 함께 유럽에 알려졌다. 그들이 15세기 초부터 순교자로서 공경받았다는 보고가 있었고, 특히 성 니콜라오 타벨릭은 그의 고향인 시베니크의 작은 형제회에서 성인 순교자로서 공경을 받았다. 19세기 후반 시베니크 교구를 중심으로 성 니콜라오 타벨릭 신부의 시복 절차가 시작되어 1889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그에 대한 공경이 승인되었다. 원래 크로아티아의 그리스도교 전파 1,300주년을 기념하는 1941년에 그들에 대한 시성식을 거행할 예정이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불가능해졌고, 1966년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가 다른 세 명의 수사 순교자에 대한 공경을 재확인하며 11월 17일을 기념일로 정했었다. 그리고 1970년 6월 21일 교황 성 바오로 6세는 로마에서 2만여 명의 크로아티아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그들을 성인품에 올렸고, 순교한 날인 11월 14일에 함께 기념하도록 했다. 이로써 성 니콜라오 타벨릭은 크로아티아인으로는 처음으로 성인이 되었고, 그와 세 명의 동료들은 예루살렘 성지에서 순교한 작은 형제회 회원 중에서 시성된 유일한 경우가 되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11월 14일 목록에서 예루살렘에서 작은 형제회의 성 니콜라오 타벨릭 신부와 세 명의 동료 수사들이 사라센 앞에서 용감하게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전파했다는 이유로 불에 타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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