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자 리카르두스 페더스톤(Richardus Fetherstone, 또는 리카르도 페더스톤)의 생애는 거의 알려진 바 없지만, 그는 교구사제로서 케임브리지(Cambridge)에서 신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박식한 사제였다. 그는 뛰어난 학식과 신심 덕분에 캐서린(Catharine of Aragon) 왕비의 왕실 전담 사제이자 그녀의 딸인 메리(Mary) 공주의 라틴어 가정교사가 되었다. 그는 헨리 8세 국왕의 결혼 무효소송에 있어서 캐서린 왕비 측 네 명의 법률가 중 하나로 뽑혔다. 그는 1529년 4월부터 시작된 회의에서 캐서린 왕비의 결혼이 유효하다는 편에 투표하였다. 1534년 그는 왕의 영국 교회에 대한 최고 수위권을 법률화한 수장령(Act of Supremacy)에 따라 앤 불린(Anne Boleyn)과의 재혼을 인정하는 계승권 승복 선서(Oath of Succession)를 강요당했을 때 이를 거부한 반역죄로 위원회를 같이 했던 로체스터(Rochester)의 성 요한 피셔(Joannes Fisher, 6월 22일) 추기경과 복자 에드워드 파월(Edward Powell) 신부 및 다른 개신교 동료들과 함께 그해 12월 런던탑에 갇혔다. 오랫동안 감옥에서 생활하던 그는 1540년 7월 30일, 가톨릭 신학자인 복자 토마스 아벨(Thomas Abel) 신부와 복자 에드워드 파월(Edward Powell) 신부와 함께 국왕의 수장령에 끝까지 반대하여 런던 중심부에 있는 스미스필드(Smithfield)로 끌려가 교수형과 극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복자 리카르도 페더스톤 신부는 1886년 12월 29일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순교한 날인 7월 30일에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그리고 2000년에 잉글랜드와 웨일스 교회의 새 전례력이 교황청에서 승인된 후에는 1970년 10월 25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성된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40위 순교자’(The Forty Martyrs of England and Wales)와 종교개혁 시대에 순교한 모든 복자 · 성인들이 ‘영국의 순교자’(The English Martyrs)라는 이름으로 5월 4일 전례 안에서 기념하게 되면서 복자 리카르도 페더스톤 또한 그날 함께 축일을 기념하게 되었다. 이날은 종교개혁 시대 영국에서 순교한 영국 성공회의 순교자와 성인들의 기념일과 같은 날이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7월 30일 목록에서 신부이자 신학 박사인 복자 리카르도 페더스톤과 동료들이 헨리 8세가 요청한 이혼에 반대하고 끝까지 로마 교황에 대한 충성을 지키다가 영국 런던의 스미스필드에서 교수대에 매달려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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