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마르가리타(Margarita)는 헝가리의 왕 벨라 4세(Bela IV)와 마리아 라스카리나(Maria Laskarina)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폴란드의 성녀 쿠네군다(Cunegundis, 7월 24일)와 복녀 욜렌타(Jolenta, 6월 11일)의 동생으로 크로아티아 왕국의 스플리트(Split) 인근 클리스(Klis) 요새에서 태어났다. 그 당시는 몽골족의 침략으로 헝가리가 위기에 처했을 때였다. 그녀의 부모는 만일 몽골족의 침략으로부터 헝가리가 무사히 해방된다면 어린 마르가리타를 하느님께 바치겠다는 약속을 했고, 그 은혜는 실제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벨라 4세 왕은 세 살 난 딸을 헝가리 중서부 베스프렘(Veszprem)에 있는 도미니코회 수도원에 맡겼다. 6년 후 성녀 마르가리타는 그녀의 부모가 오늘날 부다페스트(Budapest) 한가운데를 흐르는 도나우강(Donau R.)의 ‘토끼섬’(Nyulak szigete)이라 불리는 곳에 세운 동정 마리아 수도원으로 들어가서 지냈다. 나중에 이 섬의 이름은 그녀로 인해 마르가리타섬(Margit-sziget, Margaret Is.)으로 변경되어 오늘날까지 불리고 있다. 그녀는 그곳에서 자신의 삶 전부를 수도 생활에 봉헌하며 살고자 했다. 성녀 마르가리타는 12살 무렵 첫 서원을 했는데, 그때 정치적인 이유 등을 들어 서원을 반대하는 이들 앞에서 수녀원을 떠나느니 차라리 자신의 코와 입술을 자르라고 항변하며 자발적인 선택임을 이해시켰다. 그리고 정치적인 이유로 아버지가 보헤미아의 왕인 오토카르 2세(Ottokar II)와 결혼시키려 할 때도 완강히 물리치며 이렇게 말했다. “저는 보헤미아의 왕이 주는 왕관보다 하늘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상상할 수 없는 행복을 더욱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그렇게 수도 생활에 전념하며 18살에 종신서원을 했다. 성녀 마르가리타의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자기 극기는 여러 가지 활동을 통해 드러났다. 그녀는 가끔 온밤을 지새우며 성체 앞에서 기도하였고, 기도의 효력을 확신하며 전능하신 하느님께 간구하였다. 그녀는 이런 말을 자주 하였다. “갑자기 비를 내려 달라고 기도할 순 없지만, 어떻게든 하느님께 청하면 무엇이든지 다 받을 수 있다.” 사실 그녀의 이 말이 입증된 적이 있는데, 한 번은 두 명의 수녀가 수도원을 방문했을 때 더 있다가 가라고 했지만 즉시 떠나려 하자 그녀의 기도로 갑자기 비가 와서 그곳에 더 머물렀다고 한다. 그녀는 또한 자주 탈혼을 경험했고 기적도 많이 따랐다. 또한 사순시기가 끝날 무렵이 되면 잠을 거의 자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단식으로 인해 측은한 생각마저 들 정도까지 되곤 하였다. “성금요일은 하루 중에서 가장 짧은 날이다”라고 한 그녀의 말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1270년 1월 18일 수도원에서 선종해 그곳에 묻힌 성녀 마르가리타는 일찍부터 성인으로 공경을 받았고, 그녀의 무덤은 많은 이들이 찾는 순례지가 되었다. 성녀 마르가리타의 전구로 많은 기적이 일어나 선종 직후인 1276년 시복을 위한 절차가 시작되었으나 교황좌가 바뀌는 등의 이유로 밀리면서 잊혔다가 1789년 교황 비오 6세(Pius VI)에 의해 시복되었다. 그리고 1943년 11월 19일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1월 18일 목록에서 성녀 마르가리타가 벨라 4세 왕의 딸로서 타르타르족으로부터 조국을 구해주면 하느님께 어린 딸을 봉헌하겠다고 약속한 부모에 의해 도미니코회 수녀들에게 맡겨져 성장했고, 12살이 되었을 때 이미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와 완전히 하나가 되고자 신앙을 고백하며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했다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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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 성인명 | 제목 | 작성자 | 작성일 | 조회수 | 추천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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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마르가리타(1. ...] | 헝가리의 성녀 마르가리타: 헝가리 공주, 도미니코회 수녀 | 주호식 | 2015/01/18 | 848 |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