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군디살부스 가르시아(또는 군디살보 가르시아)는 1556년 인도 서부 뭄바이(Mumbai)에서 북쪽으로 약 50km 떨어진 해안마을인 바사이(Vasai)에서 포르투갈계 이민자로서 군인이었던 아버지와 인도인으로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당시 바사이는 포르투갈이 점령한 지역으로 남쪽의 고아(Goa)와 함께 북쪽의 중심도시로서 부유한 상업 중심지였다. 성 군디살보 가르시아는 가족과 함께 바사이 요새 안에 거주하며 예수회 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는 학교에서 평생 친구이자 동료가 된 예수회의 세바스티안 곤살베스(Sebastian Gonsalves) 신부를 만나 다양한 학문을 배우고 예수회의 평신도 교리교사로 활동하게 되었다. 그는 곤살베스 신부의 보조자로서 일본 선교단에 합류해 나가사키(長崎, Nagasaki)에 도착했고, 언어 습득이 빨라 일본어를 배워 새로 개종한 일본인 신자들을 위한 교리교사로 충실히 봉사했다. 그는 예수회에 입회하고자 했으나 여러 이유로 쉽게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뒤에 그는 일본과 마카오를 오가는 상인으로서 두각을 나타냈고, 오래지 않아 큰 성공을 거둔 사업가로 성장했다. 일본어와 문화에 능통했던 그는 일본 내의 다양한 계층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사업을 확장했고, 사업상 필리핀의 마닐라(Manila)를 자주 방문하면서 작은 형제회 회원들과 관계를 맺게 되었다. 1587년에 그는 작은 형제회의 평수사로 받아들여졌고, 당시 마닐라에서 활동하던 성 베드로 밥티스타(Petrus Baptista) 신부와 만나 그의 동반자가 되었다. 마침 1593년 마닐라 지역을 식민통치하던 에스파냐의 국왕 펠리페 2세(Felipe II)는 일본과의 평화협정을 맺기 위해 마닐라에서 활동하던 성 베드로 밥티스타 신부를 대사 자격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게 파견하였다. 이때 성 군디살보 가르시아는 일본어를 모르는 성 베드로 밥티스타 신부를 돕기 위해 통역관으로 동행하게 되었다. 일본에 도착한 성 베드로 밥티스타는 겸손하고 온화한 태도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의 협상을 평화롭게 이끌어 오늘날의 교토(京都, Kyoto) 지방인 미야코(宮古, Miyako)에서 작은 형제회 회원들이 선교하는데 필요한 많은 지원을 얻어낼 수 있었다. 그 뒤로 많은 일본인이 작은 형제회의 선교 활동에 힘입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고, 여러 영주들 또한 서서히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예수회와 함께 작은 형제회는 일본 복음화의 주역으로 성장했다. 그런데 1596년 무렵 작은 형제회 회원들이 일정한 제한을 무시하고 미야코 일대에 성당과 수도원과 병원을 건립하는 등 공공연한 전교 활동을 전개하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정치적 부담을 주고 일본 지배층들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 게다가 그해 여름 마닐라를 떠나 멕시코로 가던 에스파냐 선박 산 펠리페(San Felipe)호가 태풍에 밀려 일본 해안으로 떠밀려오면서 문제가 생겼다. 선원들이 일본 관리들과 대화 중에 에스파냐의 왕권과 정복욕을 자랑하는 듯한 말실수를 하며 선교사들에 대한 부정적 인상을 심어주었고, 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분노를 자아냈다. 결국 1596년 12월에 게이한(京阪, 교토와 오사카) 지방에서 활동하던 작은 형제회 회원들을 체포하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이 내려지면서 본격적인 박해가 시작되었고, 성 군디살보 가르시아도 미야코에서 체포되었다. 이 박해로 게이한 지방에서 체포된 이들은 작은 형제회의 신부와 수사 6명, 작은 형제회의 일본인 재속 3회원 15명, 예수회의 수사 3명 등 모두 24명에 달했다. 1597년 1월 3일, 미야코 감옥에 갇혔던 성 군디살보 가르시아 수사와 동료들은 모두 광장으로 끌려 나와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장인 나가사키까지 혹한의 추위 속에서 걸어가야 했다. 그들이 처형을 위해 나가사키까지 가는 동안 예수회 회원들을 돌보도록 오르간티노(Gnecchi-Soldo Organtino) 신부에 의해 파견된 성 베드로 스케지로(Petrus Sukejiro)와 작은 형제회 회원들을 돌보던 성 프란치스코 키치(Franciscus Kichi)도 그리스도교 신자임이 드러나 체포되었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순교의 길에 동참해 순교자는 모두 26명으로 늘어났다. 그들은 2월 5일에 나가사키 근교 우라카미(浦上, Urakami)라는 교우촌에 도착해 2명의 예수회 신부를 만나 고해성사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같은 날 성 군디살보 가르시아와 동료들은 나가사키 해안 근처에 있던 니시자카(西坂, Nishizaka) 언덕으로 끌려가 십자가형을 받고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40세였다. 나가사키의 골고타 언덕으로 불리는 니시자카 언덕에서 예수님처럼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할 수 있어서 기뻐했던 성 군디살보 가르시아와 25명의 동료는 이렇게 해서 일본 최초의 순교자들이 되었고, 그들이 순교한 언덕은 이후 ‘순교자의 언덕’으로 불리게 되었다. 성 군디살보 가르시아와 25명의 동료 순교자들은 1627년 9월 교황 우르바노 8세(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26위의 일본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그는 인도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성인품에 올랐고, 1998년 그가 태어난 곳에 설립된 바사이 교구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그는 곤살로/곤살보/곤잘로 가르시아(Gonsalo/Gonsalvo/Gonzalo Garcia)로도 불린다. 옛 “로마 순교록”은 성 바오로 미키와 25명의 동료가 순교한 2월 5일 목록에서 그들의 순교 사실을 기록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1969년의 전례력 개정과 함께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이 로마 보편 전례력 안에 추가되었다. 그러면서 성녀 아가타(Agatha, 2월 5일) 동정 순교자와의 중복을 피하려고 2월 6일로 날짜를 옮겨 기념하고 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 또한 2월 6일 목록에서 26위의 일본 성인인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에 대해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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