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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성 미카엘의)(2.6)

프란치스코(성 미카엘의)(2.6) 기본정보 [기본정보] [사진/그림] [자료실] 인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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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명 프란치스코(성 미카엘의) (Francis of St. Michael)
축일 2월 6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신부, 순교자
활동지역 일본(Japan)
활동연도 1544-1597년
같은이름 미구엘, 방지거, 프란체스꼬, 프란체스꾸스, 프란체스코, 프란체스쿠스, 프란치스꼬, 프란치스꾸스, 프란치스쿠스, 프랜시스
성인 기본정보

   성 미카엘의 성 프란치스쿠스(Franciscus de San Miguel, 또는 성 미카엘의 성 프란치스코)는 1544년 에스파냐의 바야돌리드(Valladolid) 근방 라 파리야(La Parilla)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신심 깊은 부모에게 기도와 봉사에 대해 배운 그는 부모를 도와 농사일을 하며 지냈다. 1566년 부모가 몇 달 사이로 모두 선종하자 그는 수도자로 살 결심을 하고 그해 9월 말에 바야돌리드의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였다. 그리고 다음 해에 평수사로서 첫 서원을 하면서 ‘프란치스코 데 산 미구엘’이라는 수도명을 택했는데, 아마도 그가 서원한 날이 성 미카엘 대천사 축일이라서 그런 듯하다. 그는 겸손하게 수도원의 일을 보며 봉사했고, 자발적으로 엄격한 금욕 생활을 실천했다. 또한 선교사로 파견되기를 원했던 그는 1581년에 세비야(Sevilla)에서 출발하는 멕시코 선교단의 일원이 되었다. 멕시코에 도착한 그는 수도원의 문지기로 봉사하며 가난한 이들에게 큰 사랑을 베풀었다.

   여기서 그는 성 베드로 밥티스타(Petrus Baptista) 신부를 만나 그와 평생을 함께하게 되었다. 성 미카엘의 성 프란치스코 수사는 1584년에 성 베드로 밥티스타 신부와 함께 당시 에스파냐의 식민지배를 받고 있던 필리핀의 마닐라(Manila)로 가서 9년 정도 활동했다. 그는 마닐라의 작은 형제회 수도원에서 지내는 동안 사제품을 받았는데, 이미 기도와 참회 생활 그리고 헌신적인 봉사와 자선을 통해 원주민들로부터 큰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었다. 그러던 중 1593년 에스파냐의 국왕 펠리페 2세(Felipe II)의 명으로 일본과의 평화협정을 맺기 위해 성 베드로 밥티스타 신부가 대사 자격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게 파견될 때 통역을 맡은 성 군디살보 가르시아(Gundisalvus Garcia) 수사와 함께 그도 성 베드로 밥티스타 신부를 수행해 일본으로 가게 되었다.

   동료와 함께 일본에 도착한 성 베드로 밥티스타 신부는 겸손하고 온화한 태도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의 협상을 평화롭게 이끌어 오늘날의 교토(京都, Kyoto) 지방인 미야코(宮古, Miyako)에서 작은 형제회 회원들이 선교하는데 필요한 많은 지원을 얻어낼 수 있었다. 그 뒤로 많은 일본인이 작은 형제회의 선교 활동에 힘입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고, 여러 영주들 또한 서서히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예수회와 함께 작은 형제회는 일본 복음화의 주역으로 성장했다. 그런데 1596년 무렵 작은 형제회 회원들이 일정한 제한을 무시하고 미야코 일대에 성당과 수도원과 병원을 건립하는 등 공공연한 전교 활동을 전개하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정치적 부담을 주고 일본 지배층들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 게다가 그해 여름 마닐라를 떠나 멕시코로 가던 에스파냐 선박 산 펠리페(San Felipe)호가 태풍에 밀려 일본 해안으로 떠밀려오면서 문제가 생겼다. 선원들이 일본 관리들과 대화 중에 에스파냐의 왕권과 정복욕을 자랑하는 듯한 말실수를 하며 선교사들에 대한 부정적 인상을 심어주었고, 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분노를 자아냈다.

   결국 1596년 12월에 게이한(京阪, 교토와 오사카) 지방에서 활동하던 작은 형제회 회원들을 체포하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이 내려지면서 본격적인 박해가 시작되었고, 성 미카엘의 성 프란치스코도 미야코에서 체포되었다. 이 박해로 게이한 지방에서 체포된 이들은 작은 형제회의 신부와 수사 6명, 작은 형제회의 일본인 재속 3회원 15명, 예수회의 수사 3명 등 모두 24명에 달했다. 1597년 1월 3일, 미야코 감옥에 갇혔던 성 미카엘의 성 프란치스코 신부와 동료들은 모두 광장으로 끌려 나와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장인 나가사키(長崎, Nagasaki)까지 혹한의 추위 속에서 걸어가야 했다. 그들이 처형을 위해 나가사키까지 가는 동안 예수회 회원들을 돌보도록 오르간티노(Gnecchi-Soldo Organtino) 신부에 의해 파견된 성 베드로 스케지로(Petrus Sukejiro)와 작은 형제회 회원들을 돌보던 성 프란치스코 키치(Franciscus Kichi)도 그리스도교 신자임이 드러나 체포되었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순교의 길에 동참해 순교자는 모두 26명으로 늘어났다. 그들은 2월 5일에 나가사키 근교 우라카미(浦上, Urakami)라는 교우촌에 도착해 2명의 예수회 신부를 만나 고해성사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같은 날 성 미카엘의 성 프란치스코와 동료들은 나가사키 해안 근처에 있던 니시자카(西坂, Nishizaka) 언덕으로 끌려가 십자가형을 받고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53세였다.

   나가사키의 골고타 언덕으로 불리는 니시자카 언덕에서 예수님처럼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할 수 있어서 기뻐했던 성 미카엘의 성 프란치스코와 25명의 동료는 이렇게 해서 일본 최초의 순교자들이 되었고, 그들이 순교한 언덕은 이후 ‘순교자의 언덕’으로 불리게 되었다. 성 미카엘의 성 프란치스코와 25명의 동료 순교자들은 1627년 9월 교황 우르바노 8세(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26위의 일본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옛 “로마 순교록”은 성 바오로 미키와 25명의 동료가 순교한 2월 5일 목록에서 그들의 순교 사실을 기록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1969년의 전례력 개정과 함께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이 로마 보편 전례력 안에 추가되었다. 그러면서 성녀 아가타(Agatha, 2월 5일) 동정 순교자와의 중복을 피하려고 2월 6일로 날짜를 옮겨 기념하고 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 또한 2월 6일 목록에서 26위의 일본 성인인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에 대해 기록하였다.♣

사진/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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