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천의 성 마르티누스(Martinus de la Ascension, 또는 승천의 성 마르티노)는 1567년에 에스파냐 북부 기푸스코아(Guipuzcoa)의 베아사인(Beasain)에서 태어나 마르틴 데 로이나스 이 아무나바로(Martin de Loinaz y Amunabarro)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가 바스크(Basque) 지방 출신이라는 것 외에 그의 출생과 어린 시절에 대해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는 마드리드(Madrid)의 알칼라(Alkala) 대학교에서 공부한 후 1586년 아우뇰(Aunon)에 있는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여 서원하면서 ‘승천의 성 마르티노’라는 수도명을 선택했다. 그리고 마드리드의 산 베르나르디노(San Bernardino) 수도원에서 신학 공부를 마치고 1590년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뛰어난 학문적 소양으로 인해 수도원에서 교수로 활동하게 되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선교사로 파견되기를 간절히 원했다. 마침내 1592년 초에 멕시코로 가는 선교단에 포함되어 세비야(Seville)로 이동해 배를 탔으나 강한 폭풍을 만나 원정이 중단되고 말았다. 수도원으로 돌아와 다시 새로운 함대가 구성되기를 기다리던 그는 1593년에 멕시코로 떠나는 함대에 올라 멕시코시티(Mexico City)에 도착해 수도원에서 교수로 잠시 활동한 후 이듬해에 필리핀 마닐라(Manila)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젊은이들에게 철학과 신학을 가르치면서도 일본 선교에 대한 뜻을 놓지 않았는데, 맡은 바 책임 때문에 쉽게 허락을 받지 못했다. 그러던 중 마침내 일본으로 갈 수 있는 허락을 얻어 제자인 성 프란치스코 블랑코(Franciscus Blanco)와 함께 1596년 초에 일본으로 향하는 포르투갈 배를 탔다. 제자와 함께 나가사키(長崎, Nagasaki) 항구에 도착한 그는 오늘날의 교토(京都, Kyoto) 지방인 미야코(宮古, Miyako)의 수도원에서 일본어를 배우면서 병자를 돌보는 일을 시작했고, 얼마 뒤에 오사카(Osaka, 大阪) 수도원의 원장으로 임명되어 그곳에서 옮겨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가난한 이들과 병든 사람들을 돕는 선교사들의 노력 덕분에 그리스도인의 수도 크게 늘었고, 그로 인해 지방 영주로부터 견제를 받기도 했다. 사실 그 무렵 일본 교회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1587년에 선교사 추방령을 내린 적이 있었지만, 1590년 예수회의 순찰사 알레산드로 발리냐노(Alessandro Valignano)가 인도 부왕(副王)의 사절 자격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방문한 뒤에는 금교의 제약 속에서 조심스럽게 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1593년 에스파냐의 국왕 펠리페 2세(Felipe II)는 일본과의 평화협정을 맺기 위해 마닐라에서 활동하던 작은 형제회의 성 베드로 밥티스타(Petrus Baptista) 신부를 대사 자격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파견하였다. 성 베드로 밥티스타는 겸손하고 온화한 태도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의 협상을 평화롭게 이끌어 미야코에서 선교 활동에 필요한 많은 지원을 얻어낼 수 있었다. 그런데 1596년 여름 필리핀의 마닐라를 떠나 멕시코로 가던 에스파냐 선박 산 펠리페(San Felipe) 호가 태풍으로 항로를 벗어나 일본 해안까지 밀려와 좌초하면서 스파이로 오해를 받는 등 일본과 에스파냐와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선원들이 일본 관리들과 대화 중에 에스파냐의 왕권과 정복욕을 자랑하며 일본을 무시하는 말을 하고 선교사들에 대한 부정적 인상을 심어주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분노를 자아냈다. 게다가 작은 형제회 회원들이 일정한 제한을 무시하고 교토 일대에 성당과 수도원과 병원을 건립하는 등 공공연한 전교 활동을 전개하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정치적 부담을 주고 일본 지배층들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 그 결과 1596년 말부터 게이한(京阪, 교토와 오사카) 지방에서 활동하던 작은 형제회 회원들을 체포하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과 함께 박해가 시작되었고, 승천의 성 마르티노도 오사카에서 체포되었다. 이 박해로 게이한 지방에서 체포된 이들은 작은 형제회의 신부와 수사 6명, 작은 형제회의 일본인 재속 3회원 15명, 예수회의 수사 3명 등 모두 24명에 달했다. 1597년 1월 3일, 오사카에서 미야코로 끌려와 감옥에 갇혔었던 승천의 성 마르티노 신부와 동료들은 모두 광장으로 끌려 나와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장인 나가사키(長崎, Nagasaki)까지 혹한의 추위 속에서 걸어가야 했다. 그들이 처형을 위해 나가사키까지 가는 동안 예수회 회원들을 돌보도록 오르간티노(Gnecchi-Soldo Organtino) 신부에 의해 파견된 성 베드로 스케지로(Petrus Sukejiro)와 작은 형제회 회원들을 돌보던 성 프란치스코 키치(Franciscus Kichi)도 그리스도교 신자임이 드러나 체포되었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순교의 길에 동참해 순교자는 모두 26명으로 늘어났다. 그들은 2월 5일에 나가사키 근교 우라카미(浦上, Urakami)라는 교우촌에 도착해 2명의 예수회 신부를 만나 고해성사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같은 날 승천의 성 마르티노와 동료들은 나가사키 해안 근처에 있던 니시자카(西坂, Nishizaka) 언덕으로 끌려가 십자가형을 받고 창에 찔려 순교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 30세였다. 나가사키의 골고타 언덕으로 불리는 니시자카 언덕에서 예수님처럼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할 수 있어서 기뻐했던 승천의 성 마르티노와 25명의 동료는 이렇게 해서 일본 최초의 순교자들이 되었고, 그들이 순교한 언덕은 이후 ‘순교자의 언덕’으로 불리게 되었다. 승천의 성 마르티노와 25명의 동료 순교자들은 1627년 9월 교황 우르바노 8세(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26위의 일본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옛 “로마 순교록”은 성 바오로 미키와 25명의 동료가 순교한 2월 5일 목록에서 그들의 순교 사실을 기록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1969년의 전례력 개정과 함께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이 로마 보편 전례력 안에 추가되었다. 그러면서 성녀 아가타(Agatha, 2월 5일) 동정 순교자와의 중복을 피하려고 2월 6일로 날짜를 옮겨 기념하고 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 또한 2월 6일 목록에서 26위의 일본 성인인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에 대해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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