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사르벨리우스 마클루프(Sarbellius Makhlouf, 또는 사르벨리오 마클루프)는 1828년 5월 8일 레바논 북부 브샤리(Bsharri) 지역의 외딴 마을인 베카 카프라(Bekaa-Kafra)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유세프 안톤 마클루프(Youssef Antoun Makhlouf)라는 이름을 얻었다. 베카 카프라는 해발 1,500m에서 2,750m에 이르는 레바논과 중동에서 가장 높은 지대에 있는 마을로 아랍 세계에서 여전히 그리스도인만이 모여 살아가는 유일한 지역이다. 특히 이곳은 5세기 시리아 출신 은수자인 성 마론(Maron, 2월 9일)의 무덤 주변에 설립된 베이트 마룬(Beit Maroun) 수도원을 중심으로 형성된 동방 정교회의 한 분파인 마론파(Maronites) 그리스도인들의 마을이다. 마론파는 성 마론이 선종한 후 그의 제자에 의해 시작된 공동체로 그 당시 그리스도 단의론(~單意論, Monotheletismus)을 주장해 정교회에서 분리되었고, 680년 제3차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단죄받기도 했다. 그러나 1182년 십자군 전쟁 이후 가톨릭교회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오늘날 레바논, 시리아, 팔레스티나 등지에서 시리아어로 된 고유 전례를 사용하며 가톨릭교회와 일치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 그가 태어났던 때는 레바논의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힘든 시기였다. 그의 아버지를 비롯해 많은 그리스도인이 튀르키예 군대에 의해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다. 그의 아버지도 강제 노역으로 끌려가 농작물을 당나귀에 싣고 튀르키예로 운반하는 일을 맡았는데, 1831년 8월 유세프가 3살밖에 안 되었을 때 고향에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사망했다. 당시 관습에 따라 아버지의 동생이 그의 어머니와 다섯 명의 형제들의 돌볼 책임을 맡았다. 유세프의 어머니는 자녀들이 마론파 전통에 따라 확고한 종교 교육을 받도록 하며 정기적으로 미사에 참례하고 기도하고 단식하는 법을 가르쳤다. 어려서부터 신심이 깊었던 유세프는 본당 학교에서 읽고 쓰는 법을 배웠고 복사와 성가대에서 봉사했다. 방과 후에는 집안 가축을 돌보는 일을 도우면서도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보다는 기도와 묵상을 자주 빠졌는데, 이를 위해 적절한 동굴을 찾았다. 그 동굴은 오늘날 ‘성인의 동굴’로 불리고 있다. 소년 시절 그가 가장 좋아한 책은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의 “준주성범”이었다. 그는 종종 ‘성인들의 계곡’으로 불리는 카디샤(Kadisha) 계곡의 코자야(Qozhaya)에 있는 성 안토니오 은수 수도원을 방문했는데, 그곳에는 그의 두 외삼촌이 수도승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유세프는 그곳에서 마론파 수도원의 삶을 보고 크게 감동하였다. 그런데 그의 보호자였던 삼촌과 어머니는 유세프가 결혼해 가정을 꾸리기를 바랐다. 1851년 23살이 된 유세프는 밤에 비밀리에 집을 빠져나와 산을 넘는 멀고 긴 여행 끝에 지중해에 면한 고대 항구도시인 비블로스(Byblos) 북쪽에 있는 동정 성모 마리아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1853년까지 2년간의 수련을 마친 그는 안나야(Annaya)에 있는 성 마론 수도원으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그는 첫 서원 하며 2세기의 순교자였던 성 사르벨리오의 이름을 자신의 수도명으로 선택했다. 그리고 1853년 11월에 장엄 서원을 하고 인근 수도원에서 신학과 전례, 시리아어와 아랍어 등을 공부하고 1859년에 마론파의 총대주교에게 사제품을 받았다. 그 후 성 사르벨리오 마클루프는 성 마론 수도원에서 15년 정도 모범적인 수도승으로 살았다. 엄격한 규율에 따라 긴 시간의 기도와 침묵, 단식과 고행, 육체노동을 하며 수도 생활에 전념했다. 하지만 그가 꿈꾼 삶은 고대 사막의 교부들처럼 은수자로 사는 것이었다. 1875년 대수도원장의 특별 허락을 받은 성 사르벨리오 마클루프는 다른 두 형제와 함께 수도원 맞은편에 있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은둔 수도원에서 살게 되었다. 그는 1898년 뇌졸중으로 선종할 때까지 23년 동안 5세기의 은수자 성 마론의 모범을 따라 은수자로서 매우 엄격한 삶을 살았다. 그의 성덕이 널리 알려지면서 점점 많은 사람이 상담이나 축복을 청하기 위해 찾아왔다. 그는 또한 성체성사에 대한 위대한 신심을 갖고 있었다. 가끔 수도원장이 인근 마을에 가서 성체성사를 집전하도록 했을 때 그는 매우 기쁘게 이를 받아들였다. 그는 기도 중에 몸이 공중에 뜨는 은총도 받았다. 성 사르벨리오 마클루프는 1898년 12월 24일, 주님 성탄 대축일 전날 늦은 오후에 안나야 수도원에서 선종해 근처 수도승들의 무덤에 묻혔다. 그의 사후 몇 차례의 치유 기적이 일어나면서 그의 무덤은 레바논 사람이건 아니건, 그리스도인이건 아니건 수많은 사람이 순례하는 장소가 되었다. 그의 전구를 통한 기적과 영웅적 미덕이 인정되어 시복 절차가 시작되었고, 마침내 1965년 12월 5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폐막하기 3일 전에 3천여 명의 레바논 순례자와 수많은 성직자가 참석한 가운데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 5월 29일)에 의해 시복되었다. 그리고 1977년 10월 9일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같은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시성식에는 마론파의 총대주교와 레바논 정부 대표들도 참석했다. 이로써 성 사르벨리오 마클루프는 로마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오른 최초의 마론파 동방 전례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 10월 22일)는 종종 교회는 두 개의 허파(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를 갖고 있는데, 우리는 그 둘로부터 호흡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성 사르벨리오 마클루프 같은 성인이야말로 가톨릭교회의 다양성과 일치의 참된 가치를 깨닫게 해주는 좋은 예라고 했다. 성 사르벨리오 마클루프의 축일은 그가 선종한 12월 24일에 기념해왔다. 2002년 새로운 로마 미사 경본이 출판되면서 그의 기념일이 7월 24일로 옮겨졌고, 로마 보편 전례력에서 선택 기념일로 지내도록 결정되었다. 그가 선종한 날이 주님 성탄 대축일 전야와 겹쳐 축일을 성대히 기념하는 데 어려움이 있어 7월 24일로 옮긴 듯하며, 그날은 1927년에 두 번째로 그의 관을 열고 이장한 날이기도 하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7월 24일 목록에서 레바논 마론파의 수도회 사제인 성 사르벨리오 마클루프가 엄격한 은둔 생활과 더 높은 완덕의 삶을 추구하기 위해 레바논의 안나야 수도원에서 나와 은둔처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금식과 기도로 극도의 절제 속에서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기다가 12월 24일 주님 안에서 평안한 안식에 이르렀다고 기록하였다. 성 사르벨리오 마클루프는 레바논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고, 마론파 교회에서는 7월 세 번째 주일에 그의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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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 성인명 | 제목 | 작성자 | 작성일 | 조회수 | 추천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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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사르벨리오 마클 ...] | 성 사르벨리오 마클루프 사제 | 주호식 | 2012/07/13 | 808 |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