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엑토르 발디비엘소 사에스는 1910년 10월 31일 아르헨티나(Argentina)의 수도인 부에노스아이레스(Buenos Aires)의 가난한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시내 중심지에 위치한 바리의 성 니콜라우스(Nicolaus de Bari) 성당에서 세례성사를 받았다.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그의 부모는 1914년 에스파냐로 되돌아 왔고, 그곳에서 그리스도 교육 수사회 수사들과 알고 지내던 그는 수도회에 입회하기로 결심했다. 1924년 그는 언젠가 자신이 태어난 곳에 가서 선교사로 활동할 날을 소망하며 수련기를 마치기 위해 벨기에(Belgie)로 갔다. 1926년 8월 7일 수련기에 들어가 1927년 10월 7일 첫 서원을 하며 예수의 베니토(Benito, Benedictus de Jesus)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 후 그는 자신의 원의와는 달리 장상에 의해 1929년 8월 24일 에스파냐 아스토르가(Astorga)의 학교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자신의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였다. 그런 다음 그는 1933년에 투론의 학교로 다시 파견되었다. 청소년에 대한 그의 헌신은 곧 그에게 순교의 월계관을 준비시켜 주었다. 당시 투론 지역은 1931년부터 1939년까지 이어진 에스파냐 내란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1934년 10월 초 수사들은 그 달의 첫 금요일을 준비하기 위해 어린이들의 고해성사를 달라고 미에레스에 있던 예수 고난회 소속 성 인노켄티우스 드 라 임마쿨라다(Innocentius de la Immaculada) 신부를 청했다. 그런데 그 달 5일 새벽에 좌익 혁명군들이 학교에 들이닥쳤고, 며칠 뒤인 8일 밤 성 키릴루스 베르트란(Cyrillus Bertran) 교장 수사와 성 엑토르 발디비엘소 사에스를 포함한 8명의 동료 수도자 그리고 고해성사를 주러 온 성 인노켄티우스 드 라 임마쿨라다 신부가 아스투리아스(Asturias)의 혁명 세력에 의해 재산을 강탈당하고 끌려 나가 총살당해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 성 키릴루스 베르트란과 성 엑토르 발디비엘소 사에스를 포함한 8명의 동료 수도자 그리고 성 인노켄티우스 드 라 임마쿨라다는 1990년 4월 29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999년 11월 21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같은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는 아르헨티나 사람으로는 첫 번째 성인이다.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시성식 강론에서 “순교자는 전쟁의 영웅이 아니라 신앙의 증거자이며, 그들은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교훈을 주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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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 성인명 | 제목 | 작성자 | 작성일 | 조회수 | 추천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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