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안토니우스 갈바오(Antonius Galvao, 또는 안토니오 갈바오)는 1739년 브라질(Brazil) 상파울로(Sao Paulo) 주(洲)의 과라팅게타(Guaratingueta) 시에서 높은 사회적 지위를 지닌 열심한 가톨릭 신앙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안토니오 갈바오 데 프란카(Antonio Galvao de Franca)는 무역업에 종사하는 관대한 사람으로 작은 형제회의 재속 3회원이었고, 어머니 이자벨 레이테 데 바로스(Izabel Leite de Barros)는 1755년 38살의 나이로 일찍 사망하기 전까지 11명의 자녀를 낳았으며 남편과 마찬가지로 애덕 생활에 있어서 출중하였다. 그녀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녀 소유의 의복을 하나도 찾을 수 없었는데, 이는 이미 가난한 이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갈바오는 13살 때 아버지에 의해 벨렘(Belem)에 있는 예수회 신학교로 보내졌으나 잘 적응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후에 아버지는 갈바오에게 작은 형제회에서 성소를 찾아보도록 권유하였다. 그래서 갈바오는 1760년 4월 15일, 21살 때 리우데자네이루(Rio de Janeiro) 주의 마카쿠(Macacu)에 있는 성 보나벤투라(Bonaventura)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수련기 동안 그는 경건한 신앙심과 열정 그리고 모범적인 덕행으로 잘 알려졌다. 그는 1761년 4월 16일 종신서원을 하며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를 지지하는 작은 형제회의 서원을 했다. 그 당시 성모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 교리는 여전히 논쟁 중이었다. 다음 해에 사제품을 받은 그는 상파울로에 있는 작은 형제회 수도원으로 파견되었고, 그곳에서 신학과 철학에 대한 학업을 계속하였다. 1768년에 그는 설교자, 고해신부, 수도원의 문지기 등 중요한 직책에 임명되었다. 1769-1770년까지 그는 상파울로에서 수도 서원은 하지 않지만 공동생활을 하는 은수자들의 공동체인 ‘성녀 테레사의 은수 명상의 집’(Recollection of St. Teresa) 고해신부로 활동했다. 여기서 갈바오 신부는 깊은 신앙심을 갖고 참회 생활을 하던 성령의 헬레나 마리아(Helena Maria of the Holy Spirit) 수녀를 만났다. 그녀는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은수자들을 위한 새로운 은수 명상의 집을 설립하라는 환시를 보았다고 주장하였다. 고해사제였던 그는 헬레나 마리아 수녀의 메시지를 연구하며, 메시지의 근거가 확실하고 초자연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들을 수 있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1774년 2월 2일 갈바오 신부와 헬레나 마리아 수녀는 공동으로 ‘천주 섭리의 원죄 없으신 잉태의 성모 마리아 수녀회’를 설립하였다. 이 수녀회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수녀회’를 모델로 해서 설립되었다. 1775년 2월 23일 헬레나 마리아 수녀가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자 갈바오 신부는 갓 설립된 수녀회의 책임자 직무를 겸손과 신중함으로 떠맡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완고한 상파울로 당국 책임자로부터 수녀원을 폐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갈바오 신부는 신앙으로 이 결정을 수용했고 수녀들 또한 순명했지만 수녀원을 떠나지는 않았다. 결국 대중들의 압력과 주교의 노력으로 수녀원은 곧 다시 문을 열게 되었다. 그 후 계속해서 수도 성소자들이 증가하자 더 넓은 생활공간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갈바오 신부는 수십 년 동안 수녀원과 성당을 건립하는 일에 헌신하였다. 건축 사업과 수녀원 안팎의 의무들에 더해서 그는 은수 명상의 집 은수자들의 양성에 전념하였다. 그래서 그들을 위한 규칙서를 작성했는데, 이는 내적 생활과 종교적 훈련을 위한 안내서였다. 그가 설립한 수녀회는 1929년에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수녀회로 통합되었다. 상황이 어느 정도 평온해 보일 때 시 당국의 또 다른 개입은 갈바오 신부에게 더 큰 시련을 가져다주었다. 자신의 아들을 성나게 한 어느 병사에게 총사령관이 사형을 선고하자 그 병사를 변호하던 갈바오 신부는 추방의 위험에 놓였다. 하지만 다시금 대중들의 요구가 성공하여 그 명령을 철회시킬 수 있었다. 1781년 그는 마카쿠 수도원의 수련장 신부로 발령받았고, 이어서 1798년에는 상파울로의 성 프란치스코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으며 1801년에 재임되었다. 그러나 은수자들과 상파울로 주교가 작은 예수회 관구에 호소하여 갈바오 신부는 수녀회로 다시 돌아왔다. 그는 1811년에 상파울로의 소로카바(Sorocaba)에 성녀 클라라(Clara) 수녀원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11개월 후에 상파울로의 성 프란치스코 수도원으로 되돌아갔다. 말년에 그는 주교와 수도원장으로부터 상파울로 루스(Luz)의 은수 명상의 집에서 머무를 허락을 받았고, 그곳에서 1822년 12월 23일 선종하였다. 그의 유해가 안치된 은수 명상의 집 성당은 그 후 평화와 애덕의 사람인 갈바오 신부의 전구를 통해 은사를 입은 신앙인들의 순례지가 되어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그는 1998년 바티칸에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다. 그리고 2007년 5월 11일 브라질을 사목방문 중인 교황 베네딕투스 16세(Benedictus XVI)에 의해 상파울루의 캄포 데 마르테(Campo de Marte) 공항에서 시성식을 갖고 고통 받는 예수 성심의 성녀 바울리나(Paulina do Coracao Agonizante de Jesus, 7월 9일)에 이어 두 번째 브라질 교회의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브라질 출신으로는 첫 번째 성인인 그의 축일은 10월 25일에 기념하기도 한다. 그는 성 안나 갈바오의 안토니우스(Anthony of Saint Anne Galvao / Santo Antonio de Sant’Ana Galvao)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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